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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 김양진(金養鎭)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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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김양진, 이중석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형태사항 크기: 22.4 X 63.2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의인 진성이씨 의인파 은졸재고택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정○년 김양진(金養鎭) 서간(書簡)
정(丁)자 들어간 해의 11월 9일에 우헌(愚軒) 김양진(金養鎭)이 상대 아우의 婚禮에 대해 축하하고, 시비 거리 등에 대해 인내하는 마음을 가지기를 당부하기 위해 이중석(李中錫)에게 보낸 편지이다. 처음 상대의 편지를 받아 상대측의 안부를 알게 되었고, 특히 상대의 아우가 영주(榮州)의 인동 장씨(仁同張氏) 집안과 혼례를 치르게 된 점을 축하하였다. 이어서 자신의 근황을 알렸고, 상대의 종숙(從叔)의 죽음에 대해서도 슬픔과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였다. 상대측에서 벌어진 산송(山訟) 분쟁과 관련한 일에 대해서도 너무 과격하게 나가지 않도록 당부하고 있다.
1차 작성자 : 김동현

상세정보

丁年 11월 9일, 愚軒 金養鎭이 상대 아우의 婚禮에 대해 축하하고 시비 거리 등에 대해 인내하는 마음을 가지기를 당부하기 위해 李中錫에게 보낸 편지
丁年 11월 9일에 愚軒 金養鎭(1829∼1901)이 상대 아우의 婚禮에 대해 축하하고 시비 거리 등에 대해 인내하는 마음을 가지기를 당부하기 위해 李中錫(1854~1912)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중석李秉淳의 曾孫이자 李晩禧의 아들로, 자가 圭範이다. 그는 義城金氏와 혼인하였는데, 의성 김씨는 바로 김양진의 딸이다. 따라서 김양진이중석의 장인이 된다.
먼저, 월초에 밖에서 돌아와 보니 이중석이 보낸 편지가 책상에 있었는데 이중석한양東橋에 머물고 있을 때 보낸 편지였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자신이 답장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는데, 지금 또 下溪로 돌아온 사람을 통해 다시 이중석의 편지를 받았다고 하면서, 자책하는 마음을 표하였다. 이어 몹시 추운 날씨에 査夫人께서 건강이 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이중석의 막내아우의 醮禮 날짜가 머지않았으니 일마다 골몰되어 있을 줄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婚處가 錦江이라고 하는데, 김양진 자신 또한 금강의 張氏 가운데 數三의 知舊가 있다고 하였다. 이중석의 편지에서 성명이 분명하게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剛彦 甫의 至親이라면 모든 상황이 흡족할 것이라고 하면서, 위안이 되고 기쁘다고 하였다. 금강은 현 영주시 평은면 금강리를 가리키는데, 仁同張氏의 집성촌이다. 이중석의 아우는 李中鎔인데, 그는 敬窩 張敬鎭(1826~1912)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중석의 부인이자 자신의 딸이 본래 계획성이 없는데 大事를 앞에 두고 있으니 어찌 句管할 수 있겠느냐고 하고, 아이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도 물었다.
김양진 자신은 지난달 보름 이후에 仲賢을 永訣하기 위해 鶴山에 갔다가 이어 河回에 가고 다시 酒泉에 당도하여 쌓였던 人事를 한 뒤에 월초에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그래서 제대로 독서하지 못한데다 大小家의 內行을 보내주고 데리고 오는 일로 진종일 골몰되어 정신없이 지냈다고 하였다. 형님께서 예전처럼 평안하게 지내시고 나머지 식구들이 평안한 것이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이중석의 學士 從叔이 사망하여 그의 葬禮를 치른 데 대해 그의 淸標와 雅致를 어디에서 다시 볼 수 있겠느냐고 하고, 葬事에 참석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부채의식을 전하였다. 山訟과 관련하여 이중석이 전에 서신을 교환하던 과정에서 이에 대해 조금이나마 언급했더라면 자신이 의견을 줄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하면서, 이제는 소용이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끝으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이중석이 편지에서 쓴 투가 너무 과격한 데 대해 인내심과 포용력을 가지는 데 힘써서 外間의 구설수를 부르지 말 것을 간절히 당부하였다.
이중석은 본관이 眞城, 자가 圭範이다. 그는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인 이병순의 증손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陶山書院의 院任을 지냈다.
1차 작성자 : 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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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정○년 김양진(金養鎭) 서간(書簡)

圭範 侍棣史 謝展。
月初。自外還見。片書在案。乃留京東橋
所付書也。方以未奉復爲恨。今又因下溪歸人。續得
手滋。乃重有以愧之也。顧何暇於不較之爲感
耶。就審至寒
萱闈鼎席。保免諐損。季氏醮日不遠。想
隨事擾汨。而抑不無勝境之感矣。聞婚處是錦江
云。吾亦於錦張。有數三知舊。而來書不明言姓名。
然若是剛彦甫至親。則凡百似相叶。爲之慰賀。女阿
合下拙謀。大事當前。曷以句管。其稚次第善保
耶。旋切慮念。拙。去月望後。爲訣仲賢。往鶴山。因向
河上。轉到酒泉。修積滯人事。月初。始得尋栖。
案籤堆塵。還成生疎活計。重以大小家轎行。
津送津來之役。鎭日擾惱。神思未貼。愁悶難言。惟
以兄節依安。餘集保將。爲幸耳。令學士從叔。
今已歸厚土矣。淸標雅致。何處更得。入地之日。緣
此跡在外。不得相拂以送。薤歌一闋。又不能寄揚
素竿。幽明之逋。極矣。縱有日後。烏能贖得耶。
負之矣負之矣。山鬧歸聞事。變至此。雖使在家承聞。
何能有所掩耳之術於疾雷之間耶。但恨君於前
此往復之間。略加提及。則庶或貢一愚於臨事畫
計之地矣。今已無及矣。不必追提。方場事幾。聞
亦彼此相失。今旣付之已事。不必滯在肚裏。而
卽見君書毫端信手之間。似不無存中之發
政。所謂噴血汚口之道。幸絶去此等辭氣。務爲
含忍包荒之計。毋召外間齒舌也。吾非右袒於
此邊者。爲君謀非我誰。以此言及之也。幸勿以先
入爲主節擧措。愼辭氣。無被岸外人月評也。
餘。村間方有慘喪。悲汨不暇。艸艸。不具式。
至 初九日。婦翁 養鎭 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