丁年 11월 9일, 愚軒 金養鎭이 상대 아우의 婚禮에 대해 축하하고 시비 거리 등에 대해 인내하는 마음을 가지기를 당부하기 위해 李中錫에게 보낸 편지
丁年 11월 9일에 愚軒 金養鎭(1829∼1901)이 상대 아우의 婚禮에 대해 축하하고 시비 거리 등에 대해 인내하는 마음을 가지기를 당부하기 위해 李中錫(1854~1912)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중석은 李秉淳의 曾孫이자 李晩禧의 아들로, 자가 圭範이다. 그는 義城金氏와 혼인하였는데, 의성 김씨는 바로 김양진의 딸이다. 따라서 김양진은 이중석의 장인이 된다.
먼저, 월초에 밖에서 돌아와 보니 이중석이 보낸 편지가 책상에 있었는데 이중석이 한양의 東橋에 머물고 있을 때 보낸 편지였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자신이 답장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는데, 지금 또 下溪로 돌아온 사람을 통해 다시 이중석의 편지를 받았다고 하면서, 자책하는 마음을 표하였다. 이어 몹시 추운 날씨에 査夫人께서 건강이 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이중석의 막내아우의 醮禮 날짜가 머지않았으니 일마다 골몰되어 있을 줄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婚處가 錦江이라고 하는데, 김양진 자신 또한 금강의 張氏 가운데 數三의 知舊가 있다고 하였다. 이중석의 편지에서 성명이 분명하게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剛彦 甫의 至親이라면 모든 상황이 흡족할 것이라고 하면서, 위안이 되고 기쁘다고 하였다. 금강은 현 영주시 평은면 금강리를 가리키는데, 仁同張氏의 집성촌이다. 이중석의 아우는 李中鎔인데, 그는 敬窩 張敬鎭(1826~1912)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중석의 부인이자 자신의 딸이 본래 계획성이 없는데 大事를 앞에 두고 있으니 어찌 句管할 수 있겠느냐고 하고, 아이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도 물었다.
김양진 자신은 지난달 보름 이후에 仲賢을 永訣하기 위해 鶴山에 갔다가 이어 河回에 가고 다시 酒泉에 당도하여 쌓였던 人事를 한 뒤에 월초에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그래서 제대로 독서하지 못한데다 大小家의 內行을 보내주고 데리고 오는 일로 진종일 골몰되어 정신없이 지냈다고 하였다. 형님께서 예전처럼 평안하게 지내시고 나머지 식구들이 평안한 것이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이중석의 學士 從叔이 사망하여 그의 葬禮를 치른 데 대해 그의 淸標와 雅致를 어디에서 다시 볼 수 있겠느냐고 하고, 葬事에 참석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부채의식을 전하였다. 山訟과 관련하여 이중석이 전에 서신을 교환하던 과정에서 이에 대해 조금이나마 언급했더라면 자신이 의견을 줄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하면서, 이제는 소용이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끝으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이중석이 편지에서 쓴 투가 너무 과격한 데 대해 인내심과 포용력을 가지는 데 힘써서 外間의 구설수를 부르지 말 것을 간절히 당부하였다.
이중석은 본관이 眞城, 자가 圭範이다. 그는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인 이병순의 증손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陶山書院의 院任을 지냈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