丙年 10월 7일, 愚軒 金養鎭이 전염병으로 인한 인명 피해상과 자신이 고생을 겪은 일에 대해 전하기 위해 李中錫에게 보낸 편지
丙年 10월 7일에 愚軒 金養鎭(1829∼1901)이 전염병으로 인한 인명 피해상과 자신이 고생을 겪은 일에 대해 전하기 위해 李中錫(1854~1912)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중석은 李秉淳의 曾孫이자 李晩禧의 아들로, 자가 圭範이다. 그는 義城金氏와 혼인하였는데, 의성 김씨는 바로 김양진의 딸이다. 따라서 김양진은 이중석의 장인이 된다.
먼저, 여름과 가을에 들어 한결같이 禍網 가운데 있었고 오직 읍의 일에 분주하여 外地의 안위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 하였다. 도로 안정된 뒤에는 그리웠으나 연이어 근심스런 일이 터져 종을 보내 안부를 묻지 못했다고 하면서, 무정한 책임을 면할 수 없으나 이중석도 五十步百步라고 하였다. 이어 査夫人, 이중석 형제, 慶이 어미, 네 명의 어린애, 이중석의 從叔 令公, 堂內 여러 사람들의 안부를 물었다. 전염병으로 인해 一網打盡된 올해의 상황에서 이중석이 있는 宜仁은 태평할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福界냐고 하였다.
이어 김양진은 자신이 4, 5개월 동안 겪은 일들이 참으로 육십 평생에 처음 있은 厄會라고 하면서, 전염병으로 인한 피해 상황을 상세히 이중석에게 전해 주었다. 4월 초부터 막내딸 및 두 손녀가 차례로 전염병에 걸려 심하게 앓았고 큰아들은 위독한 지경에 이르러 救護했다고 하면서, 쇠약한 자신의 애간장을 태웠다고 하였다. 6월에는 전염병 기운이 갑자기 일어나 순식간에 7, 8인이 죽었으며 열흘 사이에 죽은 자가 14명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래서 네 집안의 식구들을 데리고 밤에 산을 넘고 江舍로 나갔으나 보름도 되지 않아서 그곳에서도 전염병 기운이 돌아 또 다시 가족들을 데리고 떠돌게 되었다고 하였다. 8월에야 옛날에 살던 곳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나 어린 손자의 병이 한 달 동안이나 계속되다가 지난달 보름쯤에 마침내 죽고 말았다고 하였다. 그 어미 또한 몇 십일 동안이나 앓다가 며칠 전부터 조금 차도가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다만 형님께서 그럭저럭 지내고 계신다고 하였고, 그 나머지 우환은 편지에서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고 하였다. 지금은 전염병 기운이 없어졌으니 한 번 오라고 당부하였다. 추신에서도, 주변 사람들의 사망 소식 등을 전하고 이중석의 從叔에게 편지하지 못해 안타까운 자신의 마음을 전해 달라고 하였다.
이중석은 본관이 眞城, 자가 圭範이다. 그는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인 이병순의 증손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陶山書院의 院任을 지냈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