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12월 19일에 海隱 金熙成(1741~1804)이 근황을 교환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
신년 12월 19일에 海隱 金熙成(1741~1804)이 근황을 교환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金熙成는 본관이 義城, 자가 誠之로, 一枝窩 金宅東의 아들이다. 文科에 급제하고, 持平에 제수된 바 있다. 그의 딸인 義城金氏가 李秉淳의 아들인 李彙文와 혼인하였으므로, 그와 李秉淳는 서로 사돈지간이 된다. 먼저, 근래 서신 연락이 뜸하여 歲暮에 그리운 마음이 지극하였는데 방금 李秉淳이 보내 준 편지를 받으니 조금 위안이 되었다고 하였다. 더구나 李秉淳가 喪中에 잘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한층 기뻤다고 하였다. 다만 이러한 때에 애통한 심정이 어찌 李秉淳가 편지에서 말한 바와 같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仲侄의 醮禮 날짜가 점점 임박하여 지금에는 이미 머리에 갓을 썼을 것이니 매우 위안이 될 줄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들을 잃은 李秉淳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비애를 더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 조카 집과의 거리가 조금 멀어 추위를 무릅쓰고 내왕하였을 것이니, 또한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전염병으로 인해 온 집안 식구들을 내보냈다고 들었는데, 후환이 없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느냐고 하였다. 자신은 근래 앓는 상황은 면하였으나 추위를 겁내어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 것이 마치 入定한 승려 꼴과 같다고 하면서, 쇠약한 모습이 점점 심해져 감을 스스로 느끼고 있다고 하였다. 그 나머지 식구들은 모두 평안하고, 庶弟 집안의 憂患도 근래 위험한 지경을 벗어났고 또 후환도 없다고 하였다. 興陽 동생의 병은 덜해지기도 하고 심해지기도 하는데, 대저 죽을병인 듯싶다고 하였다. 한양 소식은 자신도 길에서 전하는 말을 듣기는 하였으나 자세히 듣지는 못했는데 李秉淳의 편지 내용을 받아 보니 확실한 소식인 듯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行會 文字가 없으니 아직 믿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딸이 현재로서는 병상에 몸져누워 앓고 있지는 않으니,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尙州에 우거하고 있는 자신의 동생이 仲春에 寓所를 정리하고 돌아오려고 하는데 그곳에 負逋가 많아서 收殺하는 일이 또한 신경 쓰인다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李秉淳의 숙부의 근래 체후가 어떠한지 안부를 묻고 歲暮에 그에 대한 그리운 마음이 깊다고 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