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년 5월 8일에 海隱 金熙成(1741~1804)이 근황을 교환하고 門材를 보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
갑년 5월 8일에 海隱 金熙成(1741~1804)이 근황을 교환하고 門材를 보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金熙成는 본관이 義城, 자가 誠之로, 一枝窩 金宅東의 아들이다. 文科에 급제하고, 持平에 제수된 바 있다. 그의 딸인 義城金氏가 李秉淳의 아들인 李彙文와 혼인하였으므로, 그와 李秉淳는 서로 사돈지간이 된다. 李秉淳가 보내 준 편지를 받으니 만남을 대신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더구나 편지를 읽고 李秉淳가 돌아간 뒤에 건강이 더욱 좋다는 것을 알게 되니, 한층 위안이 되었다고 하였다. 다만 날마다 奠掃하느라 피곤함이 더욱 심해지고, 江右로 한 번 가는 일이 불가피한데 날씨가 점점 더워져 건강을 상하기 십상일 것이니 걱정스런 마음을 가눌 수 없다고 하였다. 金熙成 자신은 滯氣가 갈수록 심해져서 식사량이 갈수록 줄어드니 이 때문에 근력도 따라서 떨어졌다고 하였다. 무엇보다 湫舍에서 여름을 보내는 것이 가장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李秉淳의 숙부가 春峽에 갔다가 무사히 돌아와 여독으로 고생하고 있지는 않은지 물었다. 그러면서 그의 기력이 매우 부럽다고 하였으며, 이별의 회포가 매우 서글프나 겨를이 없어 편지를 써서 보내지 못하니 자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고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汾川의 李氏를 만약 勸成할 방도가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강권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비가 내릴 기미가 없으니 보리농사가 이미 흉년으로 결판났고 移秧도 때를 놓칠 가능성이 크다고 하면서 한탄하였다. 추신에서는, 李秉淳의 仲氏가 남쪽으로 갔다가 무사히 돌아왔으며 여러 從氏들도 모두 평안한지 안부를 물었다. 또 科擧에서 落榜한 崔 君은 장래 잘 될 가망이 크다고 하였으며, 彦輝 등에 대해서는 모두 축하할 만하다고 하였다. 廊舍의 門材에 대해서 지난번에 仲氏와 약속했으니 잊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가을 뒤에 쓸 것이니 지금 베어 놓으면 마르지 않을 염려가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옹이가 없는 것으로 4, 5吐를 보내 달라고 부탁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