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년 5월 22일에 海隱 金熙成(1741~1804)이 廣興寺 모임 및 딸의 歸覲 등과 관련하여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
기년 5월 22일에 海隱 金熙成(1741~1804)이 廣興寺 모임 및 딸의 歸覲 등과 관련하여 李秉淳(1751~1818)에게 보낸 편지이다.
金熙成는 본관이 義城, 자가 誠之로, 一枝窩 金宅東의 아들이다. 文科에 급제하고, 持平에 제수된 바 있다. 그의 딸인 義城金氏가 李秉淳의 아들인 李彙文와 혼인하였으므로, 그와 李秉淳는 서로 사돈지간이 된다. 먼저, 어제 李秉淳가 답장한 데 대해 매우 기뻤다고 하고 李秉淳의 어버이의 병환이 악화되지 않고 李秉淳 또한 평안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더욱 위안이 되었다고 하였다. 金熙成 자신은 예전처럼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廣興寺 모임은 校任의 편지를 어제 보건대 國忌日과 겹치는 관계로 24일로 늦추어 會所에 서신으로 통보하였다고 했다고 하면서, 며칠 동안 머무는 데 따른 문제가 지극히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딸은 지금이 歸覲할 시기가 아니지만 늘그막에 자신의 마음이 약해져서 데리고 있으면서 볼 생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딸을 맞이하고 보낼 때의 광경은 참으로 차마 보지를 못하겠다고 하였고, 더구나 비 때문에 고생할 우려도 있으므로 한층 염려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심경은 사위인 李彙文가 일찍 요절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추신에서는, 李秉淳의 숙부의 근황이 어떠한지 안부를 묻고 늘 바빠서 안부편지를 하지 못하는 데 대해 매우 한스럽다고 하였다.
李秉淳(1751~1818)은 본관이 眞城, 자가 幼性이다. 그는 退溪 先生의 손자 李純道의 高孫인 隱拙齋 李守弘의 曾孫이다. 곧 眞城李氏 宜仁派에 속해 있다. 그는 1804년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14년에 淸安縣監로 임명되었는데, 재직 중이던 1818년에 사망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