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1년에 李英哲이 長子인 李梁에게 남긴 유서
1681년(숙종 7) 1월 16일에 李英哲(1607~1681)이 장자 李梁(1668~1685)에게 남긴 유서이다. 이영철은 李嵂(1583~1615)의 아들로서, 1666년 음직으로 童蒙敎官을 역임한 바 있다. 그는 豊山 柳氏(1605~1666)와 혼인하여 6남매를 낳았으나 모두 성혼하기 전에 잃고, 류씨도 세상을 떠났다. 이에 安東 權氏(1642~1721)를 재취로 맞이하여 3남 1녀를 낳았고, 비로소 의인파 자손이 번창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연에 대해 이영철은 유서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2대 독자로써 운명이 기구하여, 전 처의 소생인 4남 2녀가 모두 죽어버려서 다른 사람의 아들을 취하여 후사를 삼았다. 그런데 그 역시 후손 없이 요절하였으니, 선조를 모시는 일을 의탁할 곳이 없어 밤낮으로 슬피 울면서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너희들의 앞선 어머니는 자식을 잃은 후 너무 마음을 쓰다가 몸이 상하게 되어 결국 운명하고 말았다. 연세가 90인 어머니가 집에 있는데 옆에서 모시고 봉양할 사람이 없고, 나도 나이가 60에 이르러서 홀로 살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부득이 다시 장가를 들었다. 다행히 이에 너희들 3형제를 얻었으니, 어찌 하늘이 긍휼히 여긴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 소회를 보면 이영철은 재취하기 전에 양자를 들인 바 있다. 그리고 그 양자는 자식 없이 죽고 말았는데, 그 이름은 李再建이다. 그런데 이후 다시 본인의 몸에서 자식을 얻었기 때문에 누구를 종손으로 삼을지 논란의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영철은 이에 대해 정리하고 있다. 즉 형제의 순서로 보면 이재건이 가장 앞서지만, 그는 후손 없이 일찍 죽어 다시 바랄 바가 없어졌다. 그러나 그의 처인 며느리가 아직 있으니, 너희들이 아들을 낳으면 그의 후사를 잇게 하라는 것이다. 또한 나의 血子로 奉祀孫을 삼고, 再建은 次子로 삼으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장자 이량에게 유언하였다. 그러나 장자인 이량은 이후 1685년에 18세의 나이로 일찍 죽고 말았다. 그리고 셋째 아들인 李集(1672~1746)이 낳은 李守弘(1693~1760)이 이량의 양자로써 종통을 잇게 된다.
1차 작성자 : 명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