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6년(인조 24)에 祖母 金氏가 손자 李英哲에게 墓位 노비 및 토지 관리에 관하여 남긴 유서
1646년(인조 24) 2월 8일에 祖母 金氏(1558~1654)가 손자 李英哲에게 墓位 노비 및 토지 관리에 관하여 남긴 유서이다. 김씨는 이순도(李純道 1554~1584)의 처로써 남편과 아들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김씨는 본관이 善山이다. 그녀는 의인파의 시조인 李純道(1554~1584)가 향년 31세로 유명을 달리한 이후 남편 없이 70여 년 동안 가정을 꾸리면서, 처가에서 받은 재산을 기반으로 임진왜란 시기 기아를 면하게 하고 내외손을 길러낸 인물이다. 이영철은 李嵂(1583~1615)의 아들로서, 1666년 음직으로 童蒙敎官을 역임한 바 있다. 그는 豊山 柳氏(1605~1666)와 혼인하여 6남매를 낳았으나 모두 성혼하기 전에 잃고, 류씨도 세상을 떠났다. 이에 安東 權氏(1642~1721)를 재취로 맞이하여 3남 1녀를 낳았고, 비로소 의인파 자손이 번창하게 되었다.
김씨는 이 당시 89세의 나이로 손자에게 본인 부모님의 묘소의 묘위전(墓位田)과 묘지기로 제사를 대신 설행할 노비를 지정하고 있고, 이를 어떻게 관리할지 조목조목 당부하고 있다.
김씨 부모님의 家廟 제사는 外孫인 金鋈이 담당하기로 하고 奉祀條 노비전답을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버지의 묘소는 華陽寺, 어머니의 묘소는 安陰古縣에 있어서 四名日 제사는 너무 거리가 멀러 시행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두 묘소에 각각 奴 1명을 지정하여 제사를 꾸리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노비가 자식 없이 늙어버려 새로이 노비를 지정하고 있다. 즉 화양사의 묘소에는 노 旬一을, 안음고현의 묘소에는 노 奴榮을 지정하여 이들이 스스로 준비하여 제사를 설행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지정한 노비들의 자손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은 代盡할때까지는 꼭 하게 하되, 대신 그 자손들은 영영 放役시켜주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노비들이 두 묘소의 제사를 진력하여 모시지 않으면 이영철의 자손들이과 외손인 김옥의 자손들이 수시로 왕래하여 살펴 죄를 다스리라고 하고 있다.
또한 두 묘소의 祭位田畓을 명시하고자 하고 있으나, 토지의 위치나 규모를 적는 부분은 비워두었다. 이를 각 처의 묘지기에게 주고 그 전답의 소출로 제사를 마련하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혹시 한 곳의 묘소에 지정한 노비들이 흩어져 없어져 버리면, 다른 한 곳의 묘소의 노비를 적절하게 나누어 지정하고, 두 쪽 모두 노비가 없어진다면 제위전답을 다른 누군가에게 지급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라고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외손인 김옥이 김씨 부모의 제사를 주관하는데, 그의 자손이 代盡하더라도 그들이 墓所를 守護하는 일은 소홀하지 말도록 이영철의 자손들이 잘 살피라고 당부하고 있다.
문서작성 과정에 김씨 이외에 증인으로 外孫인 幼學 金恢가, 필집으로 外孫인 幼學 金夑이 참여하고 있다.
1차 작성자 : 명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