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1886년 활빈당 협박 언간(諺簡)-2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7+KSM-XB.1886.4790-20150630.073023100022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작성주체
작성지역 경상북도 예천군
작성시기 1886
형태사항 크기: 27 X 16.7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한글
소장정보 원소장처: 예천 저곡 안동권씨 춘우재고택 /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대제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관련자료

1886년 활빈당 협박 언간(諺簡)
1886년(고종 23)에 풍기군 일대에서 활동하던 도적 집단인 활빈당(活貧黨)이 춘우재 문중을 협박하면서 작성한 언간은 ①1886년 활빈당 협박 언간(諺簡)-1 ②1886년 활빈당 협박 언간(諺簡)-2 ③1886년 활빈당 협박 언간(諺簡)-3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예천 저곡 안동권씨 춘우재 고택에서 소장되어 온 자료이다.

①번 문서는 1월에 활빈당이 춘우재 문중에 보낸 것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활빈당은 춘우재 문중에 동전 1천 2백냥을 요구하였으며 그 가운데 5백냥은 이미 받아갔으며 나머지 7백냥을 가져 오라고 말하면서 22일까지 가져올 것이며 만일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성명을 보존하지 못할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문서를 작성한 이름은 기재되어 있지 않으며 장(張)과 김(金) 등 2명의 성씨만 기재되어 있으며 원형 인장을 찍었다.

②번 문서는 22일까지 7백냥을 가져오라는 지시를 변경하여 23일까지 저수지로 가져오라는 내용이다. 이때 활빈당 동료 5명이 풍기읍에 잡혀 죽음을 당하여 분한 마음을 품고 있으니 잘 알고 생각하라고 하였다. 아울러 춘우재 문중의 일원이 서포군과 모의하여 20일에 돈을 가지고 나가서 활빈당을 잡자는 약속을 들었는데, 행동을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말도 남겼다. 약속시간과 장소의 변경은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 같으며, 말미에는 초저녁황혼이 될 때 만날 것이며 뒷일 없게 하고 오라고 지시하였는데 관군을 대동하여 오지 말라고 한 듯하다. 이 문서는 자신을 중군(中軍) 김(金)이라고 표현을 하였으며 역시 원형 도장을 찍었다.

춘우재 고택은 두 번의 활빈당 협박에도 불구하고 7백냥을 가지고 나가지 않은 듯하다. 활빈당은 약속된 시간에 나오지 않은 춘우재 문중에 다시 한번 문서를 보내는데 바로 ③번 문서에 그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이 문서에서는 수차례 서신을 보내도 오지 않으니 무슨 곡절 때문인가 라고 반문하면서 아마도 산소를 파야 될 것 같다고 협박하고 27일 2更에 돈 7백냥을 가지고 도촌(道村) 위 사성(沙星) 아래 길에서 만나자고 하면서 소문 없이 오라는 당부를 덧붙이고 있다.

이 자료들은 활빈당과 관련된 흔하지 않은 문서로 활빈당의 약탈 대상 및 규모와 방법을 보여준다. 활빈당은 조선후기 이후 지주층의 과다한 수탈로 인하여 고용의 기회를 잃어버린 하층민의 저항의식으로 생긴 것이며 차츰 집단화 과정을 거쳐 화적활동을 전개하였다. 화적 활동은 육지뿐만 아니라 강과 바다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들 구성원은 대부분 농촌에서 유리된 하층민을 비롯하여 몰락양반층도 있었으며 지주층을 비롯하여 부민가를 약탈대상으로 삼았다.

약탈 방법으로는 문서에 드러나듯이 선조의 분묘를 투총한다는 협박을 주로 하였는데 당시 양반가에서 선조의 무덤을 투총한다는 것은 절대로 허용될 수 없었다. 위의 편지에서 선조의 무덤을 파내야 될 것 같다는 말은 활빈당이 춘우재 문중으로 보낸 최후의 통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활빈당은 세력이 집단화 되고 규모가 커질수록 조직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다스리기 위해 일정한 조직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역할과 기능이 분업화 되었다. 편지에 나타난 중군(中軍)이라는 표현도 분업화 된 조직체계의 일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활빈당은 반봉건투쟁을 목적으로 시작하여 자신들의 생계 보전에 힘썼다면 시대가 변하고 외세의 침략이 시작될 때에는 반침략투쟁의 성격도 가지고 약탈활동을 하였다. 이때의 약탈 대상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이들의 반침략투쟁의 성격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문서

번호

자료명

발급

수취

1886년 활빈당 협박 언간(諺簡)-1

활빈당

안동권씨 춘우재

1886년 활빈당 협박 언간(諺簡)-2

활빈당

안동권씨 춘우재

1886년 활빈당 협박 언간(諺簡)-3

활빈당

안동권씨 춘우재

1차 작성자 : 명경일
펼치기/감추기

안내정보

1886년 활빈당 협박 언간(諺簡)-2
1886년(고종 23) 1월 20일에 풍기군 일대에서 활동하던 도적 집단인 황빈당(活貧黨)이 안동권씨 춘우재 문중에게 보낸 한글 편지이다. 앞선 편지에서 활빈당은 7백 냥을 가지고 22일에 노중(路中)으로 나오지 않으면 문중의 성명(性命)을 보존치 못할 것이라고 협박한 바 있다. 이 편지는 이 약속을 23일로 변경하는 내용으로 보낸 것이다.
1차 작성자 : 명경일

상세정보

1886년에 풍기군 일대에서 활동하던 도적 집단인 活貧黨이 안동권씨 춘우재 문중에게 보낸 한글 편지
1886년(고종 23) 1월 20일에 풍기군 일대에서 활동하던 도적 집단인 活貧黨이 안동권씨 춘우재 문중에게 보낸 한글 편지이다. 앞선 편지에서 활빈당은 7백 냥을 가지고 22일에 노중(路中)으로 나오지 않으면 문중의 성명(性命)을 보존치 못할 것이라고 협박한 바 있다. 이 편지는 이 약속을 변경하는 내용으로 보낸 것이다.
다시 23일에 ‘저수’로 돈을 가지고 오라고 하고 있다. 덧붙여서, 지난번 동료들이 5명이나 풍기읍에서 잡혀 죽은 것 때문에 분한 마음을 품고 있으니 이를 잘 알고 생각하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당신 문중 사람 중에 당신이 20일에 돈을 가지고 나가니 같이 가서 탈취하자는 약속을 한 모양이라는 말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활빈당 집단이 결집성이 약한 것을 보여준다. 약속을 변경한 것 역시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차 작성자 : 명경일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86년 활빈당 협박 언간(諺簡)-2

活貧堂中軍書。
제번고。향상약七百兩은。죽
영으로가지말고。卄三日二야。향우저수
로가지고와서。후환업계소。만일불
청이면。후환은망말고。심양야소。
풍긔읍잡패주근거선。동무나五員이
주거슨즉。더욱분한마암이더즉。부
부집피심양야소。귀문일가가。읍가

서포군고。상약기을。七百兩卄二日。죽영로
간이。갓치가서탈취야먹이。후환을만
드나。그리야도일은안이되고。장후환만
되계이。심양야되。卄三日저수로오되。초
저역황혼되거든。곳오서상봉계되。뒨
일업계고오소。
丙戌正月卄日。中軍。金[着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