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0년 3월 19일, 柳台佐가 美洞으로 보내는 편지
1830년 3월 19일 柳台佐(1763-1837)가 美洞으로 보내는 편지로, 수신인의 아들이 西寄齋에 기거하며 시험과 秋到記를 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보낸 것이다.
편지는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柳台佐는 반촌에 있으면서 美洞의 소식을 듣게 되어 감사하고 위로되지만, 堂叔契兄의 상을 당하게 되어 영남의 불행이라고 했다. 원근의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기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인데 수신인이 의지하고 앙모하는 위치에서는 그 슬픔이 더욱 클 것이라고 위로했다.
柳台佐는 오래된 병으로 괴롭고, 종형은 平安道 安州府使에 부임하여 24일 성에 들어갈 것이라고 했으나 선조의 기제사가 다가와 부득이 이곳을 지나갔는데, 5일 동안 매일 백 여리의 말을 몰아서 온몸이 아파서 애석하다고 했다.
柳台佐가 편지를 쓸 당시 수신인의 아들은 한양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범절이 편안하고 西寄齋에 기거하면서 4월에 시행하는 시험과 秋到記를 위한 공부에 독실하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柳台佐는 미동으로 편지를 보내면서 朴典籍에게 보내는 세 뭉치의 편지도 함께 보내어 전해달라고 했다. 아울러 며칠 내에 문상 가겠다는 소식도 알렸다.
발급인 柳台佐는 본관은 豊山, 자는 士鉉, 호는 鶴棲이며, 父는 柳師春이다. 1794년에 抄啓文臣이 되었고 漢城府右尹, 禮曹參判, 同知義禁府事를 지냈다.『鶴棲文集』 20권 10책이 전한다.
수급인의 인명은 알 수 없으나, 미동으로 보낸 것으로 미루어 풍산 김씨 일 것이다. 미동은 풍산 김씨 11세 潛庵 金義貞(1467-1535)이 한양에서 낙향하여 세거하면서 풍산 김씨 동성마을이 되었다. 풍산 김씨는 대대로 서애 류성룡의 학문적 입장을 계승했고, 풍산 류씨와 혼인도 빈번하게 하였으며, 향촌의 여러 가지 문제에 공동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