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1년 3월 10일, 柳台佐가 종형 柳相祚에게 中臺의 현판을 새겨 보내면서 함께 보낸 편지
1821년 3월 10일에 柳台佐(1763-1837)가 종형 柳相祚(1763-1838)에게 中臺의 현판을 새겨 보내면서 함께 보낸 편지이다.
편지는 크게 두 가지 내용이 담겨있다. 첫째는 柳台佐가 金海府使 로 재직하면서 겪게 된 여러 가지 괴로운 일에 대한 언급이고, 둘째는 中臺의 현판을 새겨 소년 편으로 보낸다는 내용이다.
柳台佐는 1820년 金海府使에 제수되었는데, 그 다음해 편지를 쓸 당시 조세를 싣고 가는 배를 보낸 것, 봉산에 화재가 난 일, 柳岩回라는 자가 돈을 거두는 일로 섬사람들의 원망을 불러일으킨 것, 梁山의 두 사람이 감영을 핑계되면서 빚 독촉 하는 일 등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中臺의 현판을 새겨 쇠 못 두 개와 함께 소년 편으로 보내니, 처마 사이에 매달라고 했다. 그 밖에 사연의 전모는 알 수 없지만, 하인에 관한 일의 처리에 대해서는 근심하지 말 것이며, 甲生의 혼인은 잘 행해졌으며, 범절은 어떠했는지 물었다.
편지의 추록에는 城晩의 박의원[朴醫]에게 청할 일이 있었으나 상을 당하여 장사지내는 다음달 21일 전에 해결하기 어려울 것이며, 조기[石魚] 10마리와 권쟁이 젓갈[甘同醢] 2승을 함께 보낸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발급인 柳台佐는 초명이 柳台祚였는데, 나중에 柳台佐로 개명했다. 본은 豊山이며 자는 士鉉, 호는 鶴棲이며, 父는 柳師春이다. 1794년에 抄啓文臣이 되었고 漢城府右尹, 禮曹參判, 同知義禁府事를 지냈다.『鶴棲文集』 20권 10책이 전한다.
수급인은 종형 柳相祚로 짐작된다. 편지의 발급인에 柳台佐가 종제라고 표기했는데, 柳台佐의 편지 가운데 발급자를 종제로 적은 것은 대부분 柳相祚에게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柳相祚의 자는 爾能이고, 호는 逸愚이다. 西厓 柳成龍의 8세손이며, 조부는 柳澐이다. 아버지는 柳宗春이며, 생부는 柳海春인데, 柳台佐의 아버지와 형제 사이이다. 柳相祚와 柳台佐는 관직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하회 풍산 류씨 문중의 여러 가지 일에 앞장섰으며, 향촌 사족사회를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