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1년 1월 11일, 김해부사 柳台佐(1763-1837)가 柳岩回의 일과 세금 징수의 어려움 등을 종형 柳相祚(1763-1838)에게 적어 보내는 편지이다.
편지의 서두는 새해 인사로 시작한다. 상대방이 새해에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온 식구가 잘 지내는 것을 알게 되어 위로되고 마음이 시원하다고 하였다. 다만 從侄婦가 아직 해산하지 못하여 고통스럽고 걱정되는 가운데, 혹시 그 사이에 순산을 했다면 雜症은 없는지 물었다.
류이좌는 知禮 叔主와 함께 만나 설을 쇠었는데, 그동안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 헤어진 후에 다시 남은 서운함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柳岩回의 일’은 편지에서 그 내용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상대방이 타이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여 다시는 이곳에 와서 무한한 낭패를 만들어내는 일은 없도록 해달라고 하였다. 爾文氏와 叔華 從兄弟가 奸民이 기만하는 말을 듣고, 충고해주는 말은 듣지 않아 커다란 낭패를 당했다고 한다.
류이좌는 김해부사로 있으면서 島民들에게 세금을 징수해야 하는 상황을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소금담당[鹽漢] 李哥라는 사람은 감영에 체납된 돈 수천금을 거둬들이지 못한 사람인데, 이 문제로 島民들에게 세금을 징수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류이좌는 ‘거북의 등에서는 애초에 깎을 만한 털이 없는데, 어찌 장차 島民들에게 나눠서 징수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여 세금을 거두어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을 언급하였다.
柳岩回의 屛山講錢은 당초에 그 사람에게 내줄 때에 이미 문제가 될 것이라는 염려가 있어서, ‘典當畓文記’를 받아두었다고 하였다. 이 논은 3백여 금의 가치가 있으니, 이것을 팔아 바치는 것이 어떠한지 상대방에게 물었다. ‘生’자 들어가는 이름의 아이 혼례는 매우 경솔한 듯한데, 후회하는 일은 없을 런지, 都政을 통해서 임명된 여러 사람 가운데 李在貞은 혹시 良洞의 李郞이 맞는지 등을 물었다.
추신에는 상대방에게 보내는 선물 물목이 적혀 있다. 명란젓은 묵직하기 때문에 매번 부칠 때 마다 빠뜨렸는데, 지금 다섯 부분으로 부쳐 보내고, 홍합도 세대 보낸다고 하였다. 류이좌가 김해부사여서 해산물을 보내는 것이다. 그는 부사로 재임시 忠孝貞烈이 있는 사람을 우대했고, 養士齋를 성 밖으로 옮겼으며, 봉록을 보태어 문사들을 양사재에 머물며 강독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서리가 무단으로 점유한 토지를 백성들에게 되돌려 주기도 하였다.
발급인 류이좌는 본관은 豊山이고, 자는 士鉉이며, 호는 鶴棲이다. 西厓 柳成龍의 7대손으로, 父는 柳師春이다. 1794년 문과 급제한 이후 승문원가주서를 비롯하여 漢城府右尹, 禮曹參判, 同知義禁府事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鶴棲文集』 20권 10책이 전한다.
수급인은 종형 류상조로 짐작된다. 류이좌가 ‘종제’라고 표기한 편지의 대부분은 류상조에게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류상조와 류이좌는 풍산류씨 문중 활동에 앞장섰으며, 향촌 사족사회를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류상조의 자는 爾能이고, 호는 逸愚이다. 西厓 柳成龍의 7대손이며, 조부는 柳澐이다. 아버지는 柳宗春이며, 생부는 柳海春인데, 류이좌의 아버지와 형제 사이이다. 1794년 문과급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저서로 『燕行錄』과 『逸愚集』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