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1년 12월 17일에 柳台佐가, 江院의 일, 鄕堂의 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병풍을 만들고 있는 사실을 전하고 설날 祭需 및 용품을 보내기 위해 종형 柳相祚에게 보낸 편지
1821년 12월 17일에 柳台佐가, 江院의 일, 鄕堂의 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병풍을 만들고 있는 사실을 전하고 설날 祭需 및 용품을 보내기 위해 종형 柳相祚에게 보낸 편지이다.
남쪽으로 와서 소식이 막혔었는데 官隸가 돌아옴에 下狀을 받았으며 그 후 여러 날이 지난 요즘 눈 내리는 추위 속에 안부가 어떠한 지 물었다. 緬禮를 잘 치른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正穴을 쓰지 못했다는 소식에 대해 局內이므로 염려가 없을 것이라고 위로하였다. 자신은 병으로 항상 괴로우며 糴政으로 바빠 눈 가는 데마다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라고 하였다.
江院의 일에 대해서 저 무리가 上言할 계획이라 들었는데 과연 정확히 전달된 것인지를 궁금해 하고 만약 그렇다면 다행이라고 하였다. 營題가 물에 물 탄 듯 매사가 그런 식이라며 탄식하였다. 上村의 喪事를 안타까워하며 時沴이 다시 유행함을 걱정하였다. 鄕堂의 일에 대해서는 결단코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되므로 깊이 헤아려서 처리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와 같이 한다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할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近思錄』을 베껴서 책으로 장정하여 보내는데 상세하게 살펴보지 못했으므로 젊은이들을 시켜 정밀하게 살펴보도록 하라고 하였다. 글씨가 거침을 탄식하였다. 사람을 보낸다는 말은 침실 병풍을 만들어 보내려는 것이었는데 재목을 찾아도 얻지 못하다가 근래에 겨우 얻어 왔는데 또 匠人이 없어서 봄에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였다. 종이가 오면 또한 보낼 것이라고 하였다.
梁山과 熊川에서 居中을 맞은 것은 點下될 염려가 있음을 지적하고, 熊川 수령은 무슨 일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梁山 수령은 蔚山을 兼任하고 있어서 밤에 나갈 때 마음대로 吏房과 座首를 낸 일이 있었음을 전하였다. 歲除가 멀지 않은 연말에 송구영신하는 경사가 더하기를 바라며 正朝의 祭需 및 橘柚 10介와 大肉燭 30柄을 부쳤다.
발급인 柳台佐(1763-1837)는, 본은 豊山이며, 자는 士鉉, 호는 鶴棲이며, 父는 柳師春이다. 1794년에 抄啓文臣이 되었고 漢城府右尹, 禮曹參判, 同知義禁府事를 지냈다.『鶴棲文集』 20권 10책이 전한다.
수취인 柳相祚(1763∼1838)는, 자는 爾敬이고, 호는 逸愚이다. 본관은 豊山이다. 西厓 柳成龍의 8대 종손이며, 증조는 豊陽君 柳聖和이고, 조부는 豊昌君 柳澐이다. 부는 豊恩君 柳宗春이며, 생부는 柳海春이다. 1794년 春塘臺試에 급제하였고 1820년 豊安君에 封君되었다. 1824년에 蔡濟恭의 문집을 간행했고, 1829년에는 冬至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刑曹判書를 지내고, 五衛都摠府都摠官에 이르렀다. 시호는 貞簡이다. 『燕行錄』과 『逸愚集』이 전한다.
1차 작성자 : 김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