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0년 4월 24일, 柳台佐가 종형 柳相祚에게 감영에 올린 글에 것에 대한 궁금증, 제수품을 보낸다는 사실, 풍산 숙의 혼담 등에 대한 내용을 담아 보낸 편지
1820년 4월 24일 柳台佐(1763-1837)가 종형 柳相祚(1763-1838)에게 감영에 올린 글에 것에 대한 궁금증, 제수품을 보낸다는 사실, 풍산 숙의 혼담 등에 대한 내용을 담아 보낸 편지이다.
며칠 전에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고, 이날 다시 편지를 보내는데 모두 잘 지내고 있는지 안부 인사부터 전했다. 柳台佐는 병의 상태는 별 탈 없으나 정신이 혼미하여 손님 접대와 업무에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柳相祚에게 감영에 글을 올린 것에 대해 들려줄 이야기가 있는지 물었다. 단오 제수와 기제사 제수는 편지를 쓸 때 보내는데, 거기에는 전복도 포함되었다. 竹瀝은 날이 더워지면서 죽순이 생겨나 쉽게 상하기 때문에 뒷날을 도모한다고 했다. 풍산 숙의 혼담은 許恁이 서로 접촉하여 진행시켰지만, 柳台佐는 혼사를 되돌릴 방법이 없어서 답답하다고 했다.
발급인 柳台佐는 초명이 柳台祚였는데, 나중에 柳台佐로 개명했다. 본은 豊山이며 자는 士鉉, 호는 鶴棲이며, 父는 柳師春이다. 1794년에 抄啓文臣이 되었고 漢城府右尹, 禮曹參判, 同知義禁府事를 지냈다.『鶴棲文集』 20권 10책이 전한다.
수급인은 종형 柳相祚로 짐작된다. 柳台佐가 쓴 편지 가운데 발신인란에 종제라고 쓴 것 가운데 상당수의 편지가 柳相祚에게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柳相祚의 자는 爾能이고, 호는 逸愚이다. 西厓 柳成龍의 8세손이며, 조부는 柳澐이다. 아버지는 柳宗春이며, 생부는 柳海春인데, 柳台佐의 아버지와 형제 사이이다.
柳台佐와 柳相祚는 1794년 문과에 함께 급제했으며, 관직생활을 마친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문집과 족보의 간행, 山訟 문제, 의장소의 설립 등 문중의 여러 가지 문제를 앞장서서 해결해 나갔다.
한편 편지 본문에서 풍산 류씨의 혼담을 진행시킨 許恁(1782-1855)은 본관은 金海이고, 자는 敬翁이며, 호는 太初堂이다. 1835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1818년 樊巖 蔡濟恭을 위해 상소했던 일이 문제가 되어 급제자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그 후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許恁은 梅村 琴詩述, 凝窩 李源祚 등 영남 남인의 대학자들과 교유했으며, 김해 허씨는 풍산 류씨와 일찍부터 世誼가 있었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