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년 6월 23일, 從弟 柳台佐가 從兄 柳相祚에게 중앙 소식을 전함과 아울러 류이좌가 고향으로 출발할 때 필요한 노자와 짐꾼 및 網巾과 唐鞋을 염두에 두길 바라는 내용의 편지
1812년 6월 23일, 從弟 柳台佐(1763-1837)가 從兄 柳相祚(1763-1838)에게 중앙 소식을 전함과 아울러 류이좌가 고향으로 출발할 때 필요한 노자와 짐꾼 및 網巾과 唐鞋을 염두에 두길 바라는 내용의 편지이다.
편지의 서두는 여러 날 소식이 막혔다가 어제 命三 편으로 조섭하시는 기후가 한결같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매우 더워 염려되며, 관아의 제절도 무타한지 묻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류이좌는 直宿한지 4일 정도 되었는데, 고향 소식도 들을 길이 없으니, 돌아갈 날이 비록 머지는 않으나 답답한 심정을 드러냈다. 吏曹判書는 3牌 만에 肅拜를 나왔고, 어제 행한 考課에서 豊德, 漣川, 機張의 수령이 파직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靑橋 趙 校理의 전후 두 차례 편지는 과연 당일 전해주셨는지 물었다. 그가 답장이 없다는 것 때문에 연일 와서 독촉하니, 답장을 분부하여 빠른 인편으로 류이좌가 있는 곳으로 부쳐 보내달라고 하였다.
도목정사는 이달 25일에 행하지 않는다면 다음 달 4일에 할 것이라고 했으며, 張士光이 부탁한 것은 일이 그다지 어렵지는 않으니 인색하실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璿源寶略』은 이제 막 인출했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어서 한 건 인출하면 좋겠으며, 비용은 1냥이니, 하고자 하면 속히 도모하신 이후에야 인출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류이좌는 冊禮를 치른 다음날 고향으로 출발할 것이니, 상대방이 올라올 때 노자 10여 냥과 짐꾼을 미리 염두에 두었으면 하였고, 網巾과 唐鞋도 헤졌으니 이 또한 생각해 달라고 하였다. 泮村의 사람들은 우선 모두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추신은 箋文은 正書하지 못했으며, 뒤에 오는 하인을 기다릴 뿐이라는 내용이다.
발급인 柳台佐의 본관은 豊山이고, 자는 士鉉이며, 호는 鶴棲이다. 西厓 柳成龍의 7대손으로, 父는 柳師春이다. 1794년 문과 급제한 이후 승문원가주서를 비롯하여 漢城府右尹, 禮曹參判, 同知義禁府事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수급인 류상조의 자는 爾能이고, 호는 逸愚이다. 西厓 柳成龍의 7대손이며, 조부는 柳澐이다. 아버지는 柳宗春이며, 생부는 柳海春인데, 류이좌의 아버지와 형제 사이이다. 1794년 류이좌와 함께 문과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며, 저서로 『燕行錄』과 『逸愚集』이 전한다.
풍산류씨 화경당에는 류이좌가 개인적인 고민, 문중 활동과 관련된 일, 향촌의 여러 가지 사안 등으로 류상조와 주고받은 편지가 상당수 있다. 이 편지는 1812년에 작성되었는데, 류이좌는 홍문관에 근무했으며, 류상조는 개성유수였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