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년 6월 10일에 柳台佐가 하인이 오지 않는 데 대한 답답한 심정과 대궐에 올린 箋文에 대한 소식과 집을 사는 데 돈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종형 柳相祚에게 보낸 편지
1812년 6월 10일에 柳台佐가 하인이 오지 않는 데 대한 답답한 심정과 대궐에 올린 箋文에 대한 소식과 집을 사는 데 돈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종형 柳相祚에게 보낸 편지이다.
興宅의 편에 편지를 받아 잘 조리하고 계시며 營中의 모든 사람이 잘 지낸다는 소식을 들어 위로된다고 하였다. 안동 간 하인은 오지 않았고 貴得도 올려 보낸다고 했는데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자신은 더위로 곤궁한 가운데 召牌가 연달아 내려와 고민스러우며 어제 出肅하여 番을 섰고 만약 오늘 내일 중에 체직되지 못하면 또 직숙을 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候班의 행차는 어느 날 입성할 계획인지 물었으며 江華留守도 옴을 전했다. 箋文을 지어 올린 것에 대해서는 아직 각 殿宮에 封箋한 일이 없다고 하지만 營吏가 마땅히 알아서 거행할 것이라고 전하였다.
長洞 편지는 답을 받아 보냈는데 興宅의 告目 안에 집을 사는 가격이 6백량이라고 해서 수 백량이 부족함을 알리고, 公錢을 貸給할 일을 상세히 말씀드리고 부탁드렸는데 왜 外上을 거두지 않고 그렇게 말하는지를 물었다. 洪自天이 비옷[步衫]을 요청하므로 보내주기를 바라였다. 論功하여 상을 정하는 일은 備局에서 이미 啓下하였으므로 이미 行會했을 것임을 전하였다.
발급인 柳台佐(1763-1837)는, 본은 豊山이며, 자는 士鉉, 호는 鶴棲이며, 父는 柳師春이다. 1794년에 抄啓文臣이 되었고 漢城府右尹, 禮曹參判, 同知義禁府事를 지냈다.『鶴棲文集』 20권 10책이 전한다. 이 편지를 쓴 때는 홍문관에 재직하고 있었다.
수취인 柳相祚(1763∼1838)는, 자는 爾敬이고, 호는 逸愚이다. 본관은 豊山이다. 西厓 柳成龍의 8대 종손이며, 증조는 豊陽君 柳聖和이고, 조부는 豊昌君 柳澐이다. 부는 豊恩君 柳宗春이며, 생부는 柳海春이다. 1794년 春塘臺試에 급제하였고 1820년 豊安君에 封君되었다. 1824년에 蔡濟恭의 문집을 간행했고, 1829년에는 冬至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刑曹判書를 지내고, 五衛都摠府都摠官에 이르렀다. 시호는 貞簡이다. 『燕行錄』과 『逸愚集』이 전한다.
1차 작성자 : 김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