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년 1월 11일, 류이좌가 인심이 점차 안정되고 날씨가 조금 화창할 때 祠版과 內行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을 담아 보낸 편지
1812년 1월 11일, 류이좌(1763~1837)가 인심이 점차 안정되고 날씨가 조금 화창할 때 祠版과 內行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을 담아 보낸 편지이다.
류이좌가 편지를 쓸 당시에는 홍문관에 근무했다. 그는 숙모님의 체후가 건강하심을 알게 되어 위로가 되었지만, 전염병이 돌고 종도 전염병 때문에 여러 날 걸려 왔다가 결국 병막으로 나가게 되어 매우 큰 근심거리라고 했다.
류이좌는 1811년 평안도에서 발생한 홍경래의 난으로 조정이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祠版行次’ 문제를 바로 해결해 줄 수 없다고 했다. 다만 사판과 內行은 1월 달을 넘겨서는 안 될 것으로 판단하여, 인심이 조금 안정되고 날씨도 조금 화창해질 때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편지의 말미에는 李升德은 그냥 두어도 무방하기 때문에 타이르지 않았으며, 興宅이 내일 내려간다는 내용이 있지만 구체적인 사연은 알 수 없다.
추신에는 보내주신 물건을 그대로 받았다는 내용과 鄭蓍에게는 교서를 내려 병조판서에 추증했고, 정시의 관이 한양을 지나갈 때 제를 올리도록 했으며, 아울러 아버지에게도 관직을 주고, 동생은 상복 기간이 끝나는 대로 등용하라는 명이 내려왔다는 사실을 적었다.
鄭蓍는 본관은 淸州, 자는 德園, 호는 伯友이다. 1799년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훈련원주부·도총부경력 등을 역임했으며, 1811년 가산군수로 임명되었다. 평안감사 李晩秀의 장계에 따르면, 봉기군 50여 명이 관아에 돌입하여 정시에게 항복문서를 쓰라고 했으나, 그는 적을 꾸짖다가 칼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순조가 그의 의로운 공을 기려 추증하고, 동생에게도 관직을 내렸다.
발급인 柳台佐는 본관은 豊山, 자는 士鉉, 호는 鶴棲이며, 父는 柳師春이다. 1794년 문과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가 되었고, 이후 漢城府右尹, 禮曹參判, 同知義禁府事 등을 역임했다.『鶴棲文集』 20권 10책이 전한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