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년 9월 8일, 從弟 柳台佐(1763~1837)가 版轝의 행차와 龍善의 婚事 등으로 從兄 柳相祚(1763~1838)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편지는 안부인사로 시작된다. 상대방이 인편으로 보내준 편지를 받고, 감영에 도착한 상대방의 기거가 신의 보호를 받아 편안하고, 동행하는 사람들도 모두 잘 도착하였음을 알게 되어 위로되고 다행스럽지만, 피폐한 고을에 酬應함이 두서가 없을듯하니 매우 염려된다고 하였다. 류이좌는 상대방에게 부모님과 叔母主는 잘 지내고, 文義는 아들을 얻었으나 산후에 잡다한 증세가 있다가 지금에서야 조금 나아졌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또한 進士 嫂氏의 묵은 병이 더욱 심해져, 湯劑를 쓰고 있으나 염려가 심하다고 하였다.
‘版轝’의 행차가 떠나는 날을 정했으나, 추울까봐 염려하였다. 짐을 꾸리는 것은 錫兒와 文從이 하며, 노비를 많이 거느리는 문제는 상대방이 편지로 알려주는 것에 달렸으며, 祠版을 받들고 가는 것 또한 상대방이 처리할 문제라고 하였다. 류이좌는 다음 달 望日에 묘를 옮기기로 했기 때문에 몸을 뺄 수 없고, 文義도 河陽의 新行 때문에 이달 24일 떠나기로 되어 있어 형편상 갈 수 없으며, 일가의 여러 사람들 가운데 가고자 하는 자가 많으나 나가고 물러남에 말들이 많아 다만 앉아 있을 뿐이라고 했다.
류이좌는 龍善이 청주인과 혼인하기로 한 것에 대해 말했으며, 저쪽에서도 허락해줄 뜻이 있어 剛先를 보냈는데, 지금 또 한양과도 혼인하기로 약속하였으니, 두 곳의 사람이 함께 들어온다면 이를 장차 어찌하겠느냐고 하였다. 專人을 보내어 淸州와 단절하고자 한다면 별다른 사고는 없으나 이미 편지로 고했으니 절대로 도리가 아니고 또한 그 편지는 형님 이름과 아버지의 명으로 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大浦[성주 한개마을]에서 영천 梅谷의 鄭生 家에 구혼하여 이미 혼인을 정했다고 하니, 德元이 만일 정혼했다면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從弟 등은 실로 입을 열기 어려워 金溪의 從嫂에게 물었는데, 그도 淸州와 혼례를 치르고자 하니 형세가 장차 종수의 말로 결정이 날 것으로 보았다.
雙轎와 獨轎는 이미 전에 의논한 것이니 근심을 끼칠 필요가 없으며, 소가죽 5장과 靑大索30 묶음과 珠簾 등의 물건을 구해서 보내달라고 하였다. 추록에는 金重輝가 감영에 있으니 너그럽게 접대해 주심이 어떠냐고 하였다.
편지의 본문에 나오는 ‘版轝’는 부들방석을 깐 노인용 수레로, 부모를 맞이하여 봉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晉나라 潘岳의 「閑居賦」에 "모친을 판여에 모시고 가벼운 수레에 태워 드린 다음, 멀게는 경기 지방을 유람하고 가까이는 집안 뜰을 소요한다.[太夫人乃御板輿 升輕軒 遠覽王畿 近周家園]"라는 구절이 있다.
발급인 柳台佐의 본관은 豊山이고, 자는 士鉉이며, 호는 鶴棲이다. 西厓 柳成龍의 7대손으로, 父는 柳師春이다. 1794년 문과 급제한 이후 승문원가주서를 비롯하여 漢城府右尹, 禮曹參判, 同知義禁府事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수급인 류상조의 자는 爾能이고, 호는 逸愚이다. 西厓 柳成龍의 7대손이며, 조부는 柳澐이다. 아버지는 柳宗春이며, 생부는 柳海春인데, 류이좌의 아버지와 형제 사이이다. 1794년 류이좌와 함께 문과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며, 저서로 『燕行錄』과 『逸愚集』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