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6년 5월 8일, 雨澗 金虎運이 解配를 축하하는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 데 대해 양해를 구하기 위해 俛庵 李㙖에게 보낸 편지
1806년 5월 8일에 雨澗 金虎運(1768~1811)이 解配를 축하하는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 데 대해 양해를 구하기 위해 俛庵 李㙖(1739~1810)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큰 변고가 일어나서 李㙖가 늙은 나이로 古今島로 島配를 가게 되었던 상황을 언급하고, 患難이 닥쳐오는 것은 아무리 聖賢도 면하지 못하는 바라고는 하지만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집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외롭게 지내는 것이 어찌 늘그막의 李㙖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겠느냐고 하였다. 그런데 李㙖가 조금도 근심하는 기색도 없이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유배 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면서, 素患行患(처한 상황을 순리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은 옛사람들도 하기 어려운 것인데 李㙖가 능히 이를 해 냈으니 진실로 견해와 덕성이 확고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느냐고 하였다. 그러나 李㙖가 특별히 사면령을 받게 된 것은 국가의 大運氣이고 吾黨의 크게 쾌활한 일이니, 귀가 있어 들을 수 있는 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축하하는 마음이 그지없다고 하였다. 더구나 姓氏는 다르지만 한집안사람인 자신의 경우도 말할 나위가 없다고 하였다. 근래 더위와 장마가 극심한 이때에, 李㙖가 먼 길을 여행한 뒤에도 몸 상태가 유배를 가기 이전보다 더욱 좋을 줄로 생각된다고 하면서 안부를 물었다. 끝으로, 金虎運 자신은 喪中에 있고 질병이 교대로 발작하고 있기 때문에 賓友들이 함께 축하하는 날에 나아가 인사를 드릴 수가 없다고 하면서, 미안한 마음을 전하였다.
李㙖는 正祖代에 思悼世子 伸寃 上疏의 疏頭로 활약한 일을 계기로 懿陵參奉에 임명된 바 있고 또 바로 이 사건으로 인해 이해 1월에 康津縣 古今島로 유배를 갔다가 4월에 방면된 바 있다. 이는 正祖 사후 貞純王后 주도의 老論 一黨 체제가 확립되면서 英祖代의 壬午義理에 반하는 정치적 활동을 다시금 탄압하였던 정국과 관련된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