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6년 3월 17일에 李永鎭 등이 안부를 교환하기 위해 俛庵 李㙖에게 보낸 편지
1806년 3월 17일에 李永鎭 등이 안부를 교환하기 위해 俛庵 李㙖(1739~1810)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유배를 가는 李㙖와 작별한 지가 지금 3개월이 되었다고 하였다. 봄을 맞아서 덩그러니 서 있는 巖齋에는 매화나무와 오동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이러한 때에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고 하였다. 이어 李㙖가 古今島로 유배를 떠나던 당시에 집안의 자제들이 어떻게 이에 대처하였는지 물었다. 또한 전에 돌아온 인편을 통해서 李㙖가 무사히 유배지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대략 듣기는 하였으나 근래 큰비가 그치지 않던 상황에서 필시 瘴氣가 더욱 극심하였을 터인데, 유배지에서의 李㙖의 기력이 손상되지 않았으며 아들인 李秉鐸이 평안하게 모시면서 父子가 서로 위로해 주고 있는지 안부를 물었다. 그러면서 道州로 귀양을 떠날 때 蔡元定 父子가 슬픈 기색을 짓지 않았던 뜻으로 一家가 살아갈 방도를 삼을 수 있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자신들은 예전처럼 그럭저럭 지내고 있으며 건넛마 本家의 여러 조카들도 평안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李永聞은 향학열이 부족하여 평소 李㙖가 가까이 있었을 때조차 제대로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李㙖가 유배를 가게 되어 의지할 바를 잃고 허송세월하고 있으니, 이러고서도 向上의 공부를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스스로 한탄하였다. 기특하게도 李秀聃 등 여러 종형제들이 李㙖가 없는 상황에서도 學舍에 모여 날마다 공부를 하거나 글을 짓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 주었다. 끝으로, 근래 돌아가는 형편이 그런대로 괜찮으니 사면령이 내려질 날이 머지않아 있을 줄로 생각된다고 하면서, 무사히 돌아와 가르침을 들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참고로, 李㙖는 正祖代에 思悼世子 伸寃 上疏의 疏頭로 활약한 일을 계기로 懿陵參奉에 임명된 바 있고 또 바로 이 사건으로 인해 이해 1월에 康津縣 古今島로 유배를 갔다가 4월에 방면된 바 있다. 이는 正祖 사후 貞純王后 주도의 老論 一黨 체제가 확립되면서 英祖代의 壬午義理에 반하는 정치적 활동을 다시금 탄압하였던 정국과 관련된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