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6년 1월 18일, 金墢이 俛庵 李㙖가 유배를 가게 된 일과 관련하여 그 아들인 李秉鐸에게 보낸 편지
1806년 1월 18일에 金墢이 俛庵 李㙖가 유배를 가게 된 일과 관련하여 그 아들인 李秉鐸(1760~1832)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李㙖가 유배를 가게 되었다는 소식에 대해 驚歎스러운 마음을 가눌 수 없다고 하였다. 연세가 칠십인 연로하신 분의 保養은 아무리 집안에 있으면서 편안하게 쉬더라도 몸 상태를 적당하게 유지하기 어려운 것인데 더구나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환경이 좋지 못한 바다 섬에서 어떻게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며 걱정스런 마음을 표하였다. 그래도 李㙖는 患難에 대처하는 방도에 있어 평소 쌓은 힘이 있을 줄로 알지만, 모시고 있는 李秉鐸의 마음은 어떠하겠느냐며 위로하였다. 李㙖를 잡으러 온 下隷가 이미 도착하여 출발을 몹시 재촉하고 있다고 하니 저간의 광경은 보지 않아도 그려볼 수 있다고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크게 한숨이 지어진다고 하였다. 이어 李㙖와 李秉鐸 父子의 안부를 묻고, 금방 解配가 될 것이니 유배를 가는 길에 몸조심하여 더욱 건강해진 모습을 곧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金墢은 단순히 鄕里의 後生이라는 입장을 넘어서서 李㙖를 평소 앙모하던 처지인데도 이러한 患亂을 당해서 직접 나아가 전별하지 못하니 지극히 답답하다고 하였다. 끝으로, 닭 1마리를 보내니 출발하기 전에 삶아서 드시라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李㙖에게 따로 편지를 보내 드리지 못하는 데 대해 죄송스런 마음을 전하였다.
李㙖는 正祖代에 思悼世子 伸寃 上疏의 疏頭로 활약한 일을 계기로 懿陵參奉에 임명된 바 있고 또 바로 이 사건으로 인해 이해 1월에 康津縣 古今島로 유배를 갔다가 4월에 방면된 바 있다. 이는 正祖 사후 貞純王后 주도의 老論 一黨 체제가 확립되면서 英祖代의 壬午義理에 반하는 정치적 활동을 다시금 탄압하였던 정국과 관련된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