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6년 2월 9일, 孫應復 등이 유배를 간 데 대해 위로하고 약간의 부조금을 보냈음을 알리기 위해 俛庵 李㙖에게 보낸 편지
1806년 2월 9일에 孫應復 등이 유배를 간 데 대해 위로하고 약간의 부조금을 보냈음을 알리기 위해 俛庵 李㙖(1739~1810)에게 보낸 편지이다.
달포 전에 大臣이 筵席에서 아뢰어 李㙖가 島配를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하면서, 가슴을 만지면서 놀라고 탄식했다고 하였다. 李㙖가 명을 받고 출발을 재촉하였기 때문에 자신들이 편지를 쓸 겨를도 없었으니, 지금까지도 마치 먹은 음식을 제대로 삼켜 내지 못한 듯 마음에 걸린다고 하였다. 이어, 그때 李㙖가 무사히 配所로 갔으며 도착한 뒤에는 攝養하고 있는 몸 상태가 어떠한지 안부를 물었다. 그 古今島는 살기에 극히 나쁜 땅이라고 평소 악명이 높기는 하지만 李㙖는 평소에 쌓은 덕이 있기 때문에 그곳의 환경이 몸에 악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더구나 근래 조정에서 正論이 다투어 제기되고 있고 우리 嶺南에서는 임금에게 上疏하자는 논의가 있으니 李㙖가 유배지에 오랫동안 있지도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 嶺南을 위해서라도 自愛하라고 당부하였다. 자신들은 직접 전별하지도 않은 데다 먼 곳으로 심부름꾼을 보내지도 못한다고 하면서, 약소하나마 몇 緡銅을 本家에 보내서 本家로 하여금 인편을 구하는 대로 李㙖에게 보내게 했다고 하였다.
李㙖는 正祖代에 思悼世子 伸寃 上疏의 疏頭로 활약한 일을 계기로 懿陵參奉에 임명된 바 있고 또 바로 이 사건으로 인해 이해 1월에 康津縣 古今島로 유배를 갔다가 4월에 방면된 바 있다. 이는 正祖 사후 貞純王后 주도의 老論 一黨 체제가 확립되면서 英祖代의 壬午義理에 반하는 정치적 활동을 다시금 탄압하였던 정국과 관련된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