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6년 1월 18일, 李師貞 등이 俛庵 李㙖가 유배를 가게 된 일과 관련하여 李秉鐸 등에게 보낸 편지
1806년 1월 18일에 李師貞 등이 俛庵 李㙖(1739~1810)가 유배를 가게 된 일과 관련하여 李秉鐸(1760~1832) 등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李師貞 등은 새해를 맞아서 李秉鐸 등이 더욱 복될 줄로 생각된다고 하면서 매우 위안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寢郞公(參奉인데 여기서는 李㙖를 가리킴)을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라는 명이 특별히 내려졌다는 소식을 뜻밖에 듣게 되니, 매우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하였다. 李㙖가 임명된 바 있는 參奉이라는 보잘것없는 관직은 본래 벼슬살이의 부침과는 크게 관련된 것이 아니지만, 풍파가 이와 같으니 이는 참으로 嶺南의 운수와 관련된 점이 있다고 하였다. 李㙖가 어떤 상황에서도 고난을 순리대로 받아들여서 바탕을 확고하게 수립하였다고는 하나 瘴氣가 가득한 바다 섬은 평탄한 곳이 아닌 만큼, 길 떠나는 이는 양식을 싸가지고 가고 집에 있는 이는 그를 전송할 때에 근심스러운 마음이 매우 간절할 것이라고 하였다. 자신들은 窮廬에 칩거하고 있어서 달려가 위로할 수 없고, 유배 소식을 뒤늦게 받은 관계로 李㙖 등이 길을 떠나가기 전에 딴 사람이라도 대신 보내서 안부를 묻지도 못하였으니, 義理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하였다. 약소하나마 노자에 보탤 2緡銅을 보낸다고 하였다. 끝으로, 사면령이 머지않아 내리기를 기원한다고 하였다.
참고로, 李㙖는 正祖代에 思悼世子 伸寃 上疏의 疏頭로 활약한 일을 계기로 懿陵參奉에 임명된 바 있고 또 바로 이 사건으로 인해 이해 1월에 康津縣 古今島로 유배를 갔다가 4월에 방면된 바 있다. 이는 正祖 사후 貞純王后 주도의 老論 一黨 체제가 확립되면서 英祖代의 壬午義理에 반하는 정치적 활동을 다시금 탄압하였던 정국과 관련된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