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6년 5월 그믐날, 金龍壽가 解配를 축하하러 방문하거나 편지를 일찍 보내지 못한 데 대해 양해를 구하기 위해 俛庵 李㙖에게 보낸 편지
1806년 5월 그믐날에 金龍壽가 解配를 축하하러 방문하거나 편지를 일찍 보내지 못한 데 대해 양해를 구하기 위해 俛庵 李㙖(1739~1810)에게 보낸 편지이다.
金龍壽는 李㙖가 유배 신세에서 풀려나 돌아온 일은 역적의 수괴들이 복주되어 장차 晦塞되어 가던 의리가 분명하게 다시 밝아질 수 있도록 하였으니, 다른 곳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특히나 우리 영남 사람들은 더욱 주목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李㙖가 ‘古今島로 잠깐 갔다가 금방 돌아온 일은 厄運이 아니라 실은 영남의 다행스러운 일이다.’라고들 한다고 하였다. 이어, 李㙖 쪽에서 와서 소식을 전해준 자를 통해서 李㙖가 유배를 갔다 온 뒤에 건강이 예전보다 오히려 좋고 조금의 피곤한 기색도 없이 사람들과 수응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러한 경지는 李㙖의 학문적 역량으로 얻어진 것일 것이라고 하였다. 金龍壽는 李㙖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뒤부터 직접 가서 解配를 축하하고자 하였으나 병으로 늘 고생하여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없었고 축하편지도 지체하였다고 하면서, 李㙖의 이해와는 별도로 몹시 스스로 부끄러웠다고 하였다. 이번에도 가운데 동생과 동행할 것을 약속하였지만 지독한 더위로 인하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초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생겨나면 찾아뵐 계획이라고 하였다.
참고로, 李㙖는 正祖代에 思悼世子 伸寃 上疏의 疏頭로 활약한 일을 계기로 懿陵參奉에 임명된 바 있고 또 바로 이 사건으로 인해 이해 1월에 康津縣 古今島로 유배를 갔다가 4월에 방면된 바 있다. 이는 正祖 사후 貞純王后 주도의 老論 一黨 체제가 확립되면서 英祖代의 壬午義理에 반하는 정치적 활동을 다시금 탄압하였던 정국과 관련된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