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7년 3월 16일, 俛庵 李㙖가 손녀의 혼처와 관련하여 고모부인 崔思鎭에게 보낸 편지
1797년 3월 16일에 俛庵 李㙖(1739~1810)가 손녀의 혼처와 관련하여 고모부인 崔思鎭에게 보낸 편지이다.
봄기운이 이미 사라지고 날씨도 쾌적하지 않은 이때 조섭하고 있는 崔思鎭의 체후가 어떠하시냐고 안부를 물었다. 崔思鎭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늘 간절하지만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하는 것에 대해 죄송한 마음을 전하였다. 이어 崔思鎭의 起居動作이 평소보다 못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오랫동안 병을 앓으면서 앉아서만 조섭한 결과 이로 인해 고질병이 생기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李㙖는 고통을 참고 걷기 버릇하면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미 시험해 보셨느냐고 물었다. 崔思鎭의 아들 崔濼이 이곳에 왔을 때 공교롭게 어긋나서 만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전하였다. 또한 崔思鎭의 손자들이 공부를 잘하니 더욱 진취하여 그들의 문채가 볼 만할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이어 병이 계속되고 기력이 쇠약해진 李㙖 자신의 근황을 전하고, 崔思鎭과 만나서 정답게 얘기를 나눌 수 없는 점에 대해 한탄스런 마음을 전하였다. 끝으로 孫女의 婚處에 대해서 崔思鎭의 아들이 여러 차례 제시해 주었는데 자신 父子가 함께 만나서 상의하지 못했기 때문에 혼인을 허락한다는 의사를 시원스레 보이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저쪽 집안에 허락한다는 의사를 이미 보였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면서, 이런 상황에서는 잡스러운 말이 없어야겠으므로 혼인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고 하였다. 그런데 길이 너무 멀고 德夫 父子가 모두 없는 것이 크게 흠이 되는 일이라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아이가 節祀 때문에 軍威에 갔기 때문에 智翁에게 편지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이러한 사정을 그에게 알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崔思鎭은 본관이 慶州, 字가 靜而이다. 옻골에 거주하였으며, 百弗庵 崔興遠의 조카이다. 智翁은 그의 아들인 崔濼이다. 崔思鎭은 李志和의 막내 사위이므로, 李光靖에게는 처남매부지간이 되고 李㙖에게는 고모부가 된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