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4년 12월 10일, 竹軒 黃最源이 李埉의 죽음과 관련하여 俛庵 李㙖에게 보낸 편지
1794년 12월 10일에 竹軒 黃最源(1739~1819)이 李埉의 죽음과 관련하여 俛庵 李㙖(1739~1810)에게 보낸 편지이다.
요 몇 해 이래로 큰 기근과 전염병이 사람들을 병들게 하여 왕래하는 인편이 없었으니 상세히 안부를 살필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간혹 風便으로 李㙖의 집안사람들이 별탈이 없이 괜찮게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가하게 지내는 상황에서 공부가 날로 풍부해지는 유익함이 있을 줄로 생각되니, 위안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어, 어린 나이로 李㙖와 함께 從遊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스스로 부끄러워질 만큼 정신과 지각이 더욱 감퇴하고 있는 자신의 근황을 간략하게 전하였다. 黃最源은 조카 李埉이 객지에서 요절하니 李埉이 한창 나이로 요절한 것이 안타깝고 가련할 뿐만이 아니라 외조부(李埉의 曾祖인 李碩章)의 緖業이 몇 世가 되지 않아서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 될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고 하였다. 봄에 그의 寓所에 들러서 들어가 哭을 하고 廟宇에 참배하고자 하였으나 그의 아들이 천연두에 걸렸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다른 아이들을 불러 보고서 눈물을 삼키고 돌아왔는데, 그 집안 형편을 보고 생계에 대해 물어보니 자신으로 하여금 눈물을 훔치게 했다고 하였다. 또한 李埉의 遺骸가 객지에 묻혀 있어서 외로운 넋이 되었으니 더욱 가련하다고 하였다. 아들을 객지에 장사지내는 것은 바른 禮法이 아니고 返葬하여 親盡이 될 때까지 제사지내는 것은 君子가 어질다고 평하였으니, 李㙖를 비롯한 여러분들이 이에 대해 유념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外孫인 자신이 먼 곳에 있으면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해 유감스런 마음을 표하고, 조카 柳謙祚가 서신을 보내서 언급한 뜻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하였다. 자신도 한 번 가서 상의하고는 싶지만 그 시기를 기필할 수 없으니 슬픈 생각만 들 따름이라고 하였다. 끝으로 周村 형님이 늘그막에 喪妻한 데 대해 애통한 심정을 표하고, 금년에 환갑을 맞이한 善述(鴨谷 李述靖) 氏가 질병이 없고 근력이 좋은지 안부를 물었다. 그들에게 각각 편지하지 못하나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이미 이 편지에서 다 언급하였으니 편지를 돌려봐 달라고 하였고, 君玉(李憲靖의 아들인 李{土+允})에게도 이러한 뜻을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黃最源은 榮州 희야골[白洞] 출신의 학자로서, 그의 부친인 忍齋 黃應綸이 李埉의 증조부인 李碩章의 사위이므로 李碩章의 외손자가 된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