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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3년 이우(李㙖)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6+KSM-XF.1793.4717-20140630.063525700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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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이우, 김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793
형태사항 크기: 31.4 X 51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소호 한산이씨 소산종가 /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793년 이우(李㙖) 서간(書簡)
1793년 9월 19일, 이우가 금등서(金縢書)와 관련하여 김 생원(金生員)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김 생원의 안부를 알게 되어 기쁘다고 전하였다. 그리고는 사도세자가 죽은 후 금등서가 발견되었는데 영조가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하고 당시에 부탁하였던 뜻을 채제공에게 전하였던 것이라고 하였다. 도산서원에서 호계서원에 문서를 보내 성균관에 함께 통문을 보내려고 한 것은 정조의 연석(筵席)에서 하교가 나와 성토를 위한 통문을 돌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류이좌를 만난 이야기를 하며 『승정원일기』를 수정하는 일로 초겨울쯤 모임을 가지자고 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순주

상세정보

1793년 9월 19일에 俛庵 李㙖가 金縢書와 관련하여 金生員에게 보낸 편지
1793년 9월 19일에 俛庵 李㙖(1739~1810)가 金縢書와 관련하여 金生員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金生員의 숙부 어르신과 季母 부인이 연이어 돌아가신 데 대해 놀라움과 애도의 정을 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위문편지를 보냈어야 하지만 인편이 드물어 시간만 지체하고 있던 터에 金生員이 먼저 편지를 보내준 데 대해서 감사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아울러 전하였다. 金生員이 보내준 편지를 읽고서 가을의 끝에 金生員의 모친과 服中에 있는 金生員 형제가 건승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매우 위안이 되었다고 하였다. 無賴輩들에게 金生員이 모욕을 당한 일에 대해서는 그 자들에게 깊이 따질 것도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李㙖는 金縢書가 思悼世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지 수십 년 뒤에 나왔는데, 英祖思悼世子를 죽인 데 대해 후회하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과 당시에 부탁하였던 뜻을 당시의 知申(여기서는 蔡濟恭임)에게 전하였던 것이니, 이는 오늘날의 일을 훤하게 내다봤던 크고 원대한 계획이라고 하였다. 李㙖는 일전에 陶山書院에서 虎溪書院에 문서를 보내어 成均館에 함께 通文을 보내려고 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아직까지 이에 대해 조용하다고 하면서, 이는 正祖의 筵席에서의 하교가 이미 나와서 大義가 이미 천명되었으므로 聲討를 위한 通文을 돌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하였다. 지난번에 柳士鉉 즉 鶴棲 柳台佐을 만났더니 또한 日記(『承政院日記』인 듯함)를 수정하는 일로 초겨울쯤에 한 번 모임을 가지고자 하였는데, 만약 이 일이 이루어진다면 매우 다행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鄕校를 수리할 일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에 방해나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金生員이 편지에서 적었던 어떤 글자에 대해 앞으로 더욱 신중함을 기하는 태도가 필요할 것이라고 당부하였다.
참고로, 英祖가 徽寧殿에 임하였을 때 蔡濟恭이 승지로 入侍했는데 史官을 문밖으로 물러나게 한 뒤에 英祖가 한 통의 글을 주면서 神位 아래 褥席에다 솔기를 뜯고 넣어 두게 하니, 이것이 바로 金縢書이다. 곧 자신이 思悼世子를 죽인 데 대해 깊이 후회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것인데, 英祖思悼世子에 대한 처분, 곧 壬午義理를 자체 부정함으로써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노론 일파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파괴력을 지닌 것이었다.
1차 작성자 : 김장경

이미지

원문 텍스트

1793년 이우(李㙖) 서간(書簡)

答狀上。
金生員 朞服前。 省式謹封。
省式。不意凶變。
尊叔父丈奄忽
違世。承訃驚愕。不能已已。曾未幾何。
尊季母夫人又復違背。遠惟
孝思哀慟摧痛。何可堪居。卽宜以一書相慰。而便闊。因循。乃蒙
賢者不較。先施書問。承讀。感媿無以自文。仍審梢秋。
萱闈體氣萬重。
尊棣床服履有相。不任慰仰之私。春夏間意外不逞之厄。得
於傳聞。猶爲之憤然而貢悶。況尊身莅其辱。其爲憤惋。
又當如何也。然此等無賴之輩。亦何足深較也。
金謄之書。乃發於數十載之後。而
先王悔悟之明。當日付托之旨。簡於具僚之中。而特於其時之知申。其
睿謨弘遠。直是洞燭於今日之事也。豈不足感泣神明於百世之下哉。
日前。聞陶山發書於虎溪。欲齊通於館學矣。尙今寂然。豈以
筵說已出。大義已明。無所事於飛文聲討故耶。頃見柳士鉉。亦以日
記修正事。欲於初冬間。爲一番聯會。若此事得完。則何幸。而但鄕
校方有修造事。未知能不妨於此等事否耶。㙖。拙狀僅依。但日
覺衰相全具。遽然爲鄕曲之陳人。只成一笑歎耳。餘。忙草。
不宣狀儀。
情照。答狀上。
癸丑九月十九日。李㙖。狀。

來書中一字。何其不諒之甚也。古人有一言以爲知。一言以爲不知。此在
愚知。非徒爲千不當萬不當。其在
賢者語黙之節。尤不可不愼。如何如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