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3년 9월 19일에 俛庵 李㙖가 金縢書와 관련하여 金生員에게 보낸 편지
1793년 9월 19일에 俛庵 李㙖(1739~1810)가 金縢書와 관련하여 金生員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金生員의 숙부 어르신과 季母 부인이 연이어 돌아가신 데 대해 놀라움과 애도의 정을 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위문편지를 보냈어야 하지만 인편이 드물어 시간만 지체하고 있던 터에 金生員이 먼저 편지를 보내준 데 대해서 감사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아울러 전하였다. 金生員이 보내준 편지를 읽고서 가을의 끝에 金生員의 모친과 服中에 있는 金生員 형제가 건승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매우 위안이 되었다고 하였다. 無賴輩들에게 金生員이 모욕을 당한 일에 대해서는 그 자들에게 깊이 따질 것도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李㙖는 金縢書가 思悼世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지 수십 년 뒤에 나왔는데, 英祖가 思悼世子를 죽인 데 대해 후회하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과 당시에 부탁하였던 뜻을 당시의 知申(여기서는 蔡濟恭임)에게 전하였던 것이니, 이는 오늘날의 일을 훤하게 내다봤던 크고 원대한 계획이라고 하였다. 李㙖는 일전에 陶山書院에서 虎溪書院에 문서를 보내어 成均館에 함께 通文을 보내려고 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아직까지 이에 대해 조용하다고 하면서, 이는 正祖의 筵席에서의 하교가 이미 나와서 大義가 이미 천명되었으므로 聲討를 위한 通文을 돌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하였다. 지난번에 柳士鉉 즉 鶴棲 柳台佐을 만났더니 또한 日記(『承政院日記』인 듯함)를 수정하는 일로 초겨울쯤에 한 번 모임을 가지고자 하였는데, 만약 이 일이 이루어진다면 매우 다행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鄕校를 수리할 일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에 방해나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金生員이 편지에서 적었던 어떤 글자에 대해 앞으로 더욱 신중함을 기하는 태도가 필요할 것이라고 당부하였다.
참고로, 英祖가 徽寧殿에 임하였을 때 蔡濟恭이 승지로 入侍했는데 史官을 문밖으로 물러나게 한 뒤에 英祖가 한 통의 글을 주면서 神位 아래 褥席에다 솔기를 뜯고 넣어 두게 하니, 이것이 바로 金縢書이다. 곧 자신이 思悼世子를 죽인 데 대해 깊이 후회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것인데, 英祖의 思悼世子에 대한 처분, 곧 壬午義理를 자체 부정함으로써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노론 일파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파괴력을 지닌 것이었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