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3년 1월 3일에 柳台祚가 三從叔의 사건을 전하고 仲父의 편지를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1793년 1월 3일에 柳台祚가 三從叔의 사건을 전하고 仲父의 편지를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지난 겨울 집으로 돌아온 이후 크고 작은 우환이 잇달았는데 그 중에 三從叔의 참변이 일어났음을 전하였다. 삼종숙의 아내인 김씨는 혈서를 써 놓고 자살하였으며 16세 어린 아들이 5일 동안 伏閤했는데 임금께 주달되지 못하자 새해 설날 거둥을 기회로 擊錚을 하여 호소한 일을 전하였다.
이 사건은 柳台祚의 삼종숙 柳弘春에게 있었던 일로 그는 안동부의 환곡 5斗를 기한 내에 납부하지 않아 형을 받은 후 죽었다. 이를 분통하게 여긴 부인 김씨가 보름 뒤에 잇달아 자살하였고 이 때문에 16세 아들 柳井祚가 서울로 올라가 上言하였다. 이 일은 2월에 부인 김씨가 정려를 받고 안동부사는 유배되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新伯이 제수된 일을 지적하며 黨의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여기며 상대의 일도 잘 될 것으로 추측하였다. 仲父의 편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부치지 못하고 있다가 新伯의 인편을 통해 전함을 알렸다. 추록으로 直長大父에게 따로 편지 쓰지 못한다고 하였다.
문중에서는 류태조 및 그의 동생 고성군수 柳喆祚와 병조판서를 역임한 사촌 柳相祚 등이 앞장서서 義庄所를 설립하였다. 돈과 곡식을 마련하여 세금을 제때 내지 못하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발급인 柳台祚는 본관은 豊山이고, 자는 士鉉이며, 호는 鶴棲이다. 나중에 柳台佐로 개명하였으며, 父는 柳師春이다. 1794년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승문원가주서를 비롯하여 漢城府右尹, 禮曹參判, 同知義禁府事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鶴棲文集』 20권 10책이 전한다. 류이좌는 관직 생활을 마친 후 고향으로 돌아와 향촌 활동과 문중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향촌의 여론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1차 작성자 : 김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