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俛庵 李㙖가 淸道로 科擧를 보러 간 아들인 懼翁 李秉鐸에게 보낸 편지
6일에 俛庵 李㙖(1739~1810)가 淸道로 科擧를 보러 간 아들인 懼翁 李秉鐸(1760~1832)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출발하던 저녁에 小雨가 내렸는데 몸이 젖지는 않았는지 묻고, 여정이 뜻대로 되었다면 오늘 密城에 도착하였을 것인데 또 며칠에 試所로 돌아가게 되느냐고 하였다. 적지 않은 나이로 科擧를 보러 가서 온갖 일에 수고를 겪을 것이라고 하면서 걱정하는 마음을 전하고 자신도 반평생 겪어봤던 것이니 아들을 대신해서 자신이 다 근심스럽다고 하였다. 오직 온화함으로 處心하고 관대함으로 남들을 대해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科擧에 응시하는 자세는 일마다 자신의 마음을 다 해야 하지만 이치의 當否를 살펴야 하고 이해와 득실을 일체 따져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어, 현재 집안의 안부를 전해 주었다. 특히 從嫂氏의 위급한 병세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였는데, 어제부터 조금 편안해지는 기색이 있으나 증세가 덜해진 것이 아니라 숨이 조금 편안해진 것이라고 하고, 약을 쓰고는 있지만 두드러지는 효과를 보지는 못하고 있다고 한다면서 필경 어찌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또한 明仲(李㙖의 손자인 李秀賢의 장인 金熙郁)이 임신한 新婦의 新行을 11월로 잡은 데 대해, 그 시기에 무슨 긴요한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삭이 될 신부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李秉鐸이 차분하게 설득해 보라고 하였다. 校洞과 鈒浦의 안부는 어떠한지 묻고, 科擧를 보는 데 필요한 준비물은 제대로 갖췄는지도 물었다. 또 寫手 건은 뜻대로 되었는지 물었다. 李宇魯가 와서 3貫銅을 전해주었다고 하면서, 그곳에서 그를 만나면 곡절에 대해 말해 줄 것이라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佳岩 崔 室이의 반보기[半程]와 관련하여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언급하였다. 곧 자신이 9월 15일에 金谷驛에서 하기로 정했으나 金谷驛은 이쪽에서는 가깝지만 저쪽에서는 너무 멀다고 하면서, 16일 午時에 新寧의 邑店에서 하자는 뜻으로 통보해야 하는데 바로 가는 인편이 없으니 試所에서 崔琇를 만나 알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아니면 仲蘊에게 편지를 쓰도록 하라고 하였다.
본 편지는 科擧에 응시하는 자세에 대한 부분만이 李㙖의 문집인 『俛庵集』 卷8에 「寄兒」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