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5일, 觀稼堂 李泰和가 檢川의 노비들에게 거둘 身貢과 賭地 등과 관련하여 아들인 小山 李光靖에게 보낸 편지
2월 25일에 觀稼堂 李泰和(1676~1748)가 檢川의 노비들에게 거둘 身貢과 賭地 등과 관련하여 아들인 小山 李光靖(1714~1789)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科擧에서의 당락은 운수에 좌우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우선은 두고 논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어 李光靖이 科擧에서 낙방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돌아오지 않고 手下에 노복 한 명도 없이 檢川에 홀로 가게 된 상황을 언급하면서, 그곳의 아비 종들을 뜻대로 부리지 못하고 그들이 도피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머나먼 객지에서 크게 낭패를 겪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경우에는 城中에 통보하면 一家 세 사람이 지휘하고 계책을 실행해 줄 것이라고 하면서, 李光靖이 이 말을 알아듣겠느냐고 하였다. 또한 아무리 생각해봐도 종을 보내어 그로 하여금 함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 가장 낫겠는데 만약 李光靖이 종을 만나지 못한다면 자신이 종을 보내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으므로 도리어 이것이 걱정스럽다고도 하였다. 李光靖이 이 종을 만나거든 지체하지 말고 속히 내려오게 하라고 신신당부하였다.
李泰和는 이곳은 모두 별탈이 없이 지내고 있다고 하였으며, 특히 李顯靖이 科擧에서 합격하였으므로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그러나 應講했던 여러 사람들의 합격 여부는 알지 못하므로 매우 답답하다고 하였다.
끝으로, 檢川의 노비들에게 거둘 身貢과 賭地에 대해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독촉하지 않는다면 하나의 관례가 되어 반드시 후일의 폐단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철저히 처리하라고 당부하였다.
觀稼堂 李泰和는 密菴 李栽의 사위로 李光靖의 생부이다. 李光靖은 1733년에 李志和의 後嗣가 되었다. 여기서는 발급인을 생부인 李泰和로 판단하였다. 李顯靖(1721∼1789)은 본관이 韓山, 자는 孟休, 호는 約窩이다. 그는 1747년에 생원시에 입격하였는데, 이 편지의 작성연도도 이해인 것으로 보인다. 李光靖은 科擧와 인연이 닿지 않아서 1754년 이후로 완전히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학문 연구에 더욱 매진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