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일, 從弟 柳台佐가 중앙관직을 역임하는 가운데 從兄 柳相祚에게 개인, 집안, 향촌과 관련된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하기도 하고 묻기도 하는 내용의 편지
11월 10일, 從弟 柳台佐(1763-1837)가 중앙관직을 역임하는 가운데 從兄 柳相祚(1763-1838)에게 개인, 집안, 향촌과 관련된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하기도 하고 묻기도 하는 내용의 편지이다.
편지는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義興의 從兄이 돌아간 이후에 소식이 아득하여 막 우울하던 참에 당일에 공무 보는 상대방의 기거생활이 만 가지로 편안하다는 편지를 받게 되니, 위로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士能이 드러눕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落馬한 뒤 끝의 害毒 때문인지 물었다. 그 곳의 풍토가 영남지역과 달라 병이 난 것이니 이 때문에 염려가 되고, 그가 떠나고 싶어 하지 않을 적에 극구 가지 못하게 만류하지 못한 점을 한스러워 하였다. 글을 짓고 교정하는 등의 일에 골몰하고 분주한 와중에 근심을 끼쳐드려 매우 미안해하였으며, 그간에 상대방의 병의 가감 여부는 어떠한지, 인편을 찾아 상세히 알려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하였다. 류이좌는 병든 상황이 근래에 조금 좋아진 것은 약효 때문인 것 같으며, 음식 맛도 전보다 사뭇 좋아졌으나 오전에는 정신이 맑다가도 밤에 잘 때만 되면 단잠을 못 이루며, 자게 되어도 식은땀이 이불을 적시니, 괴의할만하다고 하였다. 상대방이 丸藥을 지어 보내주어 매우 감사하고 다행이나, 약값이 30냥에 가까워 고민된다고 하였으며, 여러 곳으로 갈 물건들은 또한 일일이 곧바로 전해주었다고 하였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한양의 知洞에 물어본 바는 근래에 同知로 하여금 주관하여 행하게 하였으나, 藝洞과 壺洞의 金銑에게 諺書를 그만두게 하지 않을 수 없고, 편지와 함께 보내는 것 또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새우 알 4되가량을 올려 보내달라고 하였다. 公州의 편지에 운운한 것은 매우 맹랑한 것에 관계되는데, 근래에 여러 지동의 사람들을 만나보니 그들 모두 치적과 명성은 축하할 만하다고 말하니, 이는 필시 丁 郎廳이 선동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류이좌는 臺官職에서 아직 遞職되지 못하였고, 署經을 거치지 못하여 비록 合啓에 동참할 일은 없으나, 抄啓할 일로 골몰하게 되어 매우 고민되었다. 나머지 洞에서는 이미 발송했는지, 길이 추워 매우 염려하였다. 致和가 막 入直하였으니 當該한 것에 답한 이후 받아서 보내겠다고 하였다. 게장은 매우 맛은 있으나 요즘은 모두 썩거나 상하였고, 어떤 것은 소금에 절인 정도가 매우 과하여 먹을 수 없으니 다시는 보내지 말라고 하였다. 興宅은 집을 사고 싶어 하는데 염두에 둘 수 있는지, 冠郁이 金溪를 따라 내려갔는데 처리하여 보냈는지, 관직을 그만 두고 돌아갈 것으로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 편지는 虎溪의 족인 및 汝晦의 伯氏가 올라왔다가 내려갈 적에 잠시 머물러 두고 쓴 것이라고 하였다.
발급인 柳台佐의 본관은 豊山이고, 자는 士鉉이며, 호는 鶴棲이다. 西厓 柳成龍의 7대손으로, 父는 柳師春이다. 1794년 문과 급제한 이후 승문원가주서를 비롯하여 漢城府右尹, 禮曹參判, 同知義禁府事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鶴棲文集』 20권 10책이 전한다.
수급인 류상조의 자는 爾能이고, 호는 逸愚이다. 西厓 柳成龍의 7대손이며, 조부는 柳澐이다. 아버지는 柳宗春이며, 생부는 柳海春인데, 류이좌의 아버지와 형제 사이이다. 1794년 류이좌와 함께 문과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며, 저서로 『燕行錄』과 『逸愚集』이 전한다.
1차 작성자 : 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