俛庵 李㙖가 金縢書에 대한 영남 유생들의 대응 방향과 관련하여 金都事에게 보낸 편지
俛庵 李㙖(1739~1810)가 金縢書에 대한 영남 유생들의 대응 방향과 관련하여 金都事에게 보낸 편지이다.
金縢書란 英祖가 徽寧殿에 임하였을 때 蔡濟恭이 승지로 入侍했는데 英祖가 史官을 문밖으로 물러나게 한 뒤에 한 통의 글을 주면서 神位 아래 褥席에다 솔기를 뜯고 넣어 두게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金縢書이다. 곧 자신이 思悼世子를 죽인 데 대해 깊이 후회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英祖의 思悼世子에 대한 처분, 곧 壬午義理를 자체 부정함으로써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노론 일파에게 일대 타격을 줄 수 있는 정치적 파괴력을 지닌 것이었다. 李㙖는 從兄弟인 君澤 李{土+敬}이 道會에서 돌아온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아직 그를 만나지 못해서 道會에서 있었던 논의 내용을 상세하게 듣지는 못했다고 하였다. 다만 道會에서 논의하는 과정이 순탄하지가 않았는데, 海底와 榮州, 尙州의 士林들은 金縢을 대외에 반포하기를 청하자고 주장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思悼世子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노론 세력들을 懲討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때문에서 道會에 참석한 사람들이 타협을 보지 못해서 道會가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21일에 다시 開坐하여 疏任을 정해 차출하였는데, 疏首는 北郭 李敬儒이 되고 그 나머지 여러 任員이 100여 員에 이르렀으며 상대인 金都事도 擇疏로 任員 명단에 올랐다고 하였다. 任員들을 把定하고 나서 上疏文을 작성하였는데, 대체로 金縢을 반포하기를 청하고 다시 懲討를 청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夢村 金鍾秀이 箚子를 올려서 玉冊과 金印으로 의식을 거행하기를 청하여 좌의정이 玉冊文을 지었고 도성 안에서는 다음달에 太廟에 祔廟하는 의례가 거행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하니, 정말로 이러한 이야기가 있었다면, 金縢을 반포하기를 上疏하여 청하는 것이 도리어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이어 정조가 景慕宮에 擧動하였을 때 百官들의 所懷를 받았는데, 領府事 등이 尊號를 받지 말기를 청하였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조도 더없이 중요한 禮가 아직 거행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尊號를 加上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말했다고 하였다. 끝으로, 이 편지는 상대가 보고 난 즉시 불태워버리라고 당부하였는데, 아마도 金都事에게 실제로 보내지지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이 편지는 金縢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난 일에 대한 영남 유생들의 대응 방식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다만 太廟에 祔廟하는 禮 등 그와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는 관찬 자료를 통해 당시 중앙 정계의 동향과 비교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1차 작성자 :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