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1912년 성주군(星州郡) 초전면(草田面) 월곡동(月谷洞)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6+KSM-XD.1912.4784-20140630.T47841105_1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증빙류-토지대장
내용분류: 경제-농/수산업-토지대장
작성주체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작성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작성시기 1912
형태사항 크기: 27 X 19.5
장정: 합철
수량: 82
판식: 半葉匡郭, 有界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일본어
소장정보 원소장처: 성주군청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현소장처: 성주군청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안내정보

1912년 성주군(星州郡) 초전면(草田面) 월곡동(月谷洞)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1913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照査局)에서 1912년 8월 18일부터 1912년 10월 14일까지 경상북도(慶尙北道) 성주군(星州郡) 초전면(草田面) 월곡동(月谷洞)의 전답(田畓)과 대지(垈地), 임야(林野), 분묘지(墳墓地), 지소(池沼) 등의 소유자로부터 토지신고서를 제출받아 지번(地番), 가지번(假地番), 지목(地目), 지적(地積, 坪), 소유자(所有者)의 주소와 성명, 적요(摘要) 등을 기록하여 작성한 토지장부이다.
『朝鮮土地調査事業硏究』, 愼鏞廈, 韓國硏究院, 1979
『朝鮮土地調査事業の硏究』, 宮嶋博史, 東京大學 東洋文化硏究所, 1991
『慶北마을誌』, 경상북도‧경북향토사연구협의회, 경상북도, 경북향토사연구협의회, 1991
『星州마을誌』, 성주문화원, 1998
『경상도 700년사』, 경상도 700년사 편찬위원회, 2006
「日帝下 朝鮮土地調査事業 計劃案의 變更過程」, 『史林』 32, 남기현, 수선사학회, 2009
1차 작성자 : 김효심

상세정보

1912년 朝鮮總督府 臨時土地照査局에서 慶北 星州郡 草田面 月谷洞의 田畓과 垈地, 林野, 墳墓地 등의 소유자로부터 신고서를 제출받아 작성한 토지 장부
星州郡草田面月谷洞土地調査簿
대상마을개관
월곡동(月谷洞)은 통일신라 이래 유곡방(酉谷坊)에 속했다. 고려 충숙왕 때 이견간(李堅幹)에 의해 호음곡(好音谷)으로 불리다가, 1317명곡(椧谷)으로 개칭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편으로 방(坊)이 면(面)으로 개정되었고, 유곡방유곡면으로 바뀌었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초전(草田)유곡(酉谷) 두 면이 합쳐져서 초전면이 되었고, 월곡동(月谷洞)으로 개칭되었다. 1988년 5월 월곡동월곡리로 개정되었다.
월곡(月谷)’이라는 마을 이름은 마을을 둘러싼 월산 계곡에서 산봉우리에 달이 떠오르는 광경을 상징하여 붙인 것이라 하기도 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월전(月田, 달밭)의 ‘월’과 명곡(椧谷, 홈실)의 ‘곡’을 따서 ‘월곡’이라 명명했다고도 한다. 월곡리는 7개의 자연마을, 즉 월전, 명곡, 제남(濟南, 담뒤), 내곡(內谷, 안골), 도산(陶山, 뒷미), 신계(新溪, 새뜸), 이동(梨洞, 배나물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월전, 명곡 두 개의 마을권으로 나뉜다.
월전(月田, 달밭)성산(星山)월산(月山)의 남쪽에 있는 봉양산 삼각지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 태종 때 문화 류씨(文化柳氏) 류하(柳夏)가 입향한 이래로, 창녕인 유양필(兪良弼)의 후손, 고성인 이우(李佑)의 후손, 동래인 정세로(鄭世老)의 후손, 김녕인 김연(金演)의 후손 등이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이곳 월전에 은거하였다. 1453년에 함안 조씨(咸安趙氏)가 이곳에 정착하여 인삼을 재배하면서 월산 봉우리에 달뜨는 광경을 보고 마을 이름을 월전이라 불렀다고 한다. 󰡔정감록(鄭鑑錄)󰡕에 ‘세 개의 밭이 난리에 안전하다.’고 실려 있는데, 이 세 개의 밭은 월전의 달밭과 소야(韶野)의 진밭, 남면의 선밭을 말한다고 한다.
명곡(椧谷, 홈실)은 봉양산 서편에 자리 잡고 있다. 고려 벽진장군 이총언(李忩言)의 7세손인 이방화(李芳華)가 처음 입향하였고, 11세손인 산화(山花) 이견간(李堅幹)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1317이견간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원나라 순제(順帝)가 그의 문장과 풍모에 탄복하여 그가 살고 있는 곳을 물었다. 이견간이 그림으로 그려 보이자, 순제가 보고 마을에 물이 적겠다고 염려하며, 걸수산(乞水山)의 물을 당겨오기 위하여 명(椧, 홈실)자로 마을 이름을 정해주었다고 한다.
제남(濟南, 담뒤)은 마을의 중앙으로 흐르는 제천(濟川)의 남쪽에 있으므로 ‘제남(濟南)’이라 한다. 완석정(浣石亭) 이언영(李彦英)의 종택과 사당이 있다. 도산(陶山, 뒷미)명곡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뒤에 도산이라는 산 이름을 따서 도산이라 했다고 하고, 또 질그릇처럼 오목하게 생겼다고 해서 도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문화유적으로는 문곡서원(汶谷書院), 이견간의 유허비와 신도비, 이건지(李建之)의 신도비, 완정고택(浣亭古宅), 제강서원(濟岡書院) 등이 있다. 문곡서원은 1750년(영조 26)에 세워진 서원으로서 이견간을 향사하여 오다가,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어 문곡서당으로 보존하여 오던 중 1989년에 복원되었다. 완정고택은 이언영(李彦英) 7세손 이존영이 지은 초가 6칸이다. 제강서원은 제서(濟西) 이정기(李貞基)가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1912월곡동에는 姜氏, 權氏, 金氏, 羅氏, 都氏, 朴氏, 裵氏, 白氏, 徐氏, 成氏, 宋氏, 申氏, 沈氏, 梁氏, 呂氏, 廉氏, 吳氏, 兪氏, 柳氏, 尹氏, 李氏, 張氏, 全氏, 田氏, 鄭氏, 曺氏, 池氏, 車氏, 崔氏, 韓氏, 許氏, 玄氏 등 적어도 32개 이상의 성씨가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李氏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1934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의 성(朝鮮の姓)󰡕에는 벽진 이씨 31호가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자료의 내용
1913년 朝鮮總督府 臨時土地照査局에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전국의 토지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 때 개인의 전답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토지신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해야 했으며, 만약 토지신고서를 제출하지 않는 지주가 있으면 그의 소유지는 國有地로 편입되었다. 이 같은 조치에 따라 경북 성주군 초전면 월곡동의 田畓과 垈地, 池沼, 林野, 墳墓地 등을 소유한 소유자들은 1912년 8월 18일부터 1912년 10월 14일까지 토지신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일제는 이를 근거로 『星州郡草田面月谷洞 土地調査簿』를 만들었다.
토지신고서의 제출은 여성도 가능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남자들의 이름으로 신고하였다. 그 결과 어린이들이 신고주체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여자 이름이 공문서에 기재되는 것을 기피하였던 전통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월곡동의 토지는 모두 962필지 464,730평이다. 이 가운데 田은 355필지 154,958평, 畓은 429필지 267,963평, 垈는 124필지 15,775평, 池沼는 3필지 452평, 林野는 48필지 25,126평, 墳墓地는 3필지 456평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전이 답보다 필지 수에 있어서 0.8배, 면적에 있어서 0.6배 정도 적다.
『土地調査簿』의 所有者 住所欄은 혼란스러운 면이 있다. 토지 申告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직전에 이루어 졌기 때문에 소유자 주소는 행정구역 통폐합 이전의 〮군 ․ 면 ․ 동 체제에 따라 기재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성주군 대가면 용흥동의 옛 명칭인 本牙面 荷牙洞이 『토지조사부』에 보인다. 이 명칭은 1914년에 소멸되었지만,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자료 정리에 있어서 이런 경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소유자 주소란에 주소가 기재되어 있지 않는 경우이다. 이것은 소유자 주소와 토지 소재지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주소란이 공란으로 처리된 경우는 토지 소유자 또는 신고자가 本洞民임을 의미한다. 주소가 기록되지 않은 경우에는 군 또는 면단위에서의 자료 통합을 위해서 토지소재지 동리 명을 그대로 주소로 표기하였다. 그러나 토지소재지의 군 ․ 면 ․ 동 명칭은 1914년 개편이후의 행정체제에 따랐기 때문에 타동민의 주소 표기와는 체제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토지조사부』 소유자 주소는 결과적으로 행정구역 개편 전후의 군 ․ 면 ․ 동체제가 혼재되어 있는 셈이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 군 ․ 면별 자료를 통합하고 소유자별로 정렬하여 주소를 재정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자료 이용에 있어서 이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소유자별로는 國有地는 없고, 모두 民有地이다. 월곡동유곡면 소야동유곡면 명곡동의 일부가 병합된 것이다. 이 때문에 유곡면 소야동유곡면 명곡동의 주소로 월곡동의 토지 소유를 파악할 수밖에 없다. 월곡동의 민유지 소유자는 총 230명이다. 이들 230명 가운데, 월곡동을 주소로 한 토지 소유자는 137명,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소유자는 93명이다. 월곡동 소유자의 성씨별 분포는 모두 25개 성씨로 李氏 53명, 金氏 21명, 朴氏 12명, 成氏 10명, 鄭氏 6명, 曺氏 ․ 張氏 각 5명, 宋氏 3명, 姜氏 ․ 徐氏 ․ 沈氏 ․ 呂氏 ․ 柳氏 각 2명, 羅氏 ․ 都氏 ․ 申氏 ․ 梁氏 ․ 吳氏 ․ 兪氏 ․ 全氏 ․ 田氏 ․ 池氏 ․ 車氏 ․ 韓氏 ․ 許氏 등 각 1명이다. 월곡동을 주소로 한 소유자의 토지는 전 287필지 118,149평, 답 267필지 165,873평, 대지 118필지 14,974평, 지소 1필지 63평, 임야 31필지 18,526평, 분묘지 3필지 456평이다.
기타 및 특이사항
월곡동 本洞所有地로 임야 5필지 1,197평이 있고,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로 답 9필지 5,289평이 있다. 유곡면(酉谷面) 명곡동(椧谷洞)이원준(李元俊)이 대지 1필지 207평, 임야 1필지 393평을 가지고 있는데, 공유자가 4명이 되고 그 명단이 기록 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의 성주군 초전면 월곡동의 국유지와 민유지의 토지분포 상황, 개인 또는 門中, 書院, 鄕校, 私立學校 등의 토지소유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러나 『토지조사부』의 소유자가 곧 실재의 토지소유자가 아닌 경우도 있다. 같은 호에 거주하던 父子, 兄弟가 각각 토지신고서를 제출하기도 했고, 반대로 부자, 형제간의 개별 소유지를 한 사람의 이름으로 신고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分錄과 合錄은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던 오랜 관행이었다. 또한 宗中財産을 종손 개인의 이름으로 신고한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토지조사부』를 통해 당시의 소유 실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토지조사부』의 자료적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통해 1910년대의 전답분포나 토지소유현황 등 전반적인 추세를 살펴보는 데는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土地調査事業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식민지 지배를 위한 기초적 사업 가운데 하나였고, 『토지조사부』는 바로 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식민지지배 정책과 과정, 土地 ․ 林野의 침탈의 과정, 규모 등을 살필 수 있다. 실제로 『토지조사부』에는 조선총독부의 토지침탈 국책기관이었던 東洋拓植株式會社 또는 일본인들의 토지소유 상황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토지조사부』가 동리단위로 작성되었고, 또 소유자의 거주지가 1914년 府 ․ 郡 ․ 面 ․ 洞里 통폐합 이전의 행정구역명으로 기재되어 있어서 개편 이전의 면리동의 행정편제, 동리의 규모, 호수, 거주 성씨, 개인별 토지소유 현황 등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朝鮮土地調査事業硏究』, 愼鏞廈, 韓國硏究院, 1979
『朝鮮土地調査事業の硏究』, 宮嶋博史, 東京大學 東洋文化硏究所, 1991
『慶北마을誌』, 경상북도‧경북향토사연구협의회, 경상북도, 경북향토사연구협의회, 1991
『星州마을誌』, 성주문화원, 1998
『경상도 700년사』, 경상도 700년사 편찬위원회, 2006
「日帝下 朝鮮土地調査事業 計劃案의 變更過程」, 『史林』 32, 남기현, 수선사학회, 2009
1차 작성자 : 김효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