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마을개관
고산동(高山洞)은 통일신라 이래 유곡방(酉谷坊)에 속했다.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편으로 방(坊)이 면(面)으로 개정되었으며, 유곡방도 유곡면으로 바뀌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초전(草田) ․ 유곡(酉谷) 두 면이 합쳐져 초전면이 되었다. 1988년 동(洞)이 리(里)로 개칭되어, 고산동은 고산리가 되었다.
고산동은 초전면소재지의 서북쪽 유곡천의 산간과 벽진면으로 통하는 도로에 접해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고산정(高山亭)[공산정(公山亭)], 계명골[계명동(鷄鳴洞)·김연동(金蓮洞)], 닭실[유곡(酉谷)·봉곡(鳳谷)], 손골[손동(遜洞)] 등이 있다.
고산정은 초전면소재지의 서북면 약 4Km의 유곡을 끼고 산간으로 이어지는 들목의 야성송씨 동성마을이다. 야계(倻溪) 송희규(宋希奎, 1494~1558)가 1555년 사헌부집의로 있을 때 윤원형 등의 비행을 탄핵했다가 전북 고산에 귀양을 갔었는데, 귀양지를 잊을 길이 없어 ‘고(孤)’를 ‘고(高)’로 바꾸어 고산(高山)이라고 했다. 계명골은 고산정에서 1Km정도 떨어진 산촌이다. 마을의 지형을 지내(蜈蚣)와 닭(酉)의 관계를 비유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송간(松磵) 송광정(宋光廷, 1556~1608)이 닭실과 고산정을 연결시키는 곳이라 하여 ‘김연동’으로 부르기도 하며, 야성송씨 동성마을이다. 닭실은 통일신라때부터 유방곡의 본거지 마을이다. 1895년 유곡면이 되었다가 1914년 초전면에 속했다. 손골은 닭실의 서남 벽진면으로 이어지는 협곡에 접한 곳이다.
문화유적으로는 백세각(百世閣) ․ 송간재(松磵齋) ․ 용계서당(龍溪書堂) ․ 봉강서원(鳳岡書院) 등이 있다. 백세각은 송희규가 학문을 즐긴 곳이며, 1919년 항일운동을 위해 유림의 집회소가 되기도 했다. 송간재는 송광정을 추모하기 위한 재실이다. 용계서당은 용계(龍溪) 송광계(宋光啓)의 학당이다. 봉강서원은 송희규와 송사신(宋師頣)을 향사하는 서원이다.
1912년 고산동에는 郭氏, 吉氏, 金氏, 朴氏, 裵氏, 白氏, 徐氏, 孫氏, 宋氏, 魚氏, 呂氏, 吳氏, 柳氏, 尹氏, 李氏, 鄭氏, 丁氏, 曺氏, 朱氏, 秦氏, 千氏, 崔氏, 玄氏 등 적어도 23개 이상의 성씨가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宋氏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자료의 내용
1913년 朝鮮總督府 臨時土地照査局에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전국의 토지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 때 개인의 전답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토지신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해야 했으며, 만약 토지신고서를 제출하지 않는 지주가 있으면 그의 소유지는 國有地로 편입되었다. 이 같은 조치에 따라 경북 성주군 초전면 고산동의 田畓과 垈地, 池沼, 林野, 墳墓地 등을 소유한 소유자들은 1912년 8월 26일부터 1912년 12월 6일까지 토지신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일제는 이를 근거로 『星州郡草田面高山洞 土地調査簿』를 만들었다.
토지신고서의 제출은 여성도 가능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남자들의 이름으로 신고하였다. 그 결과 어린이들이 신고주체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여자 이름이 공문서에 기재되는 것을 기피하였던 전통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고산동의 토지는 모두 632필지 306,000평이다. 이 가운데 田은 256필지 103,425평, 畓은 260필지 172,243평, 垈는 97필지 15,517평, 池沼는 1필지 256평, 林野는 15필지 14,073평, 墳墓地는 3필지 486평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전이 답보다 필지 수에 있어서 0.9배, 면적에 있어서 0.6배 정도 적다.
『土地調査簿』의 所有者 住所欄은 혼란스러운 면이 있다. 토지 申告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직전에 이루어 졌기 때문에 소유자 주소는 행정구역 통폐합 이전의 〮군 ․ 면 ․ 동 체제에 따라 기재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성주군 대가면 용흥동의 옛 명칭인 本牙面 荷牙洞이 『토지조사부』에 보인다. 이 명칭은 1914년에 소멸되었지만,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자료 정리에 있어서 이런 경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소유자 주소란에 주소가 기재되어 있지 않는 경우이다. 이것은 소유자 주소와 토지 소재지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주소란이 공란으로 처리된 경우는 토지 소유자 또는 신고자가 本洞民임을 의미한다. 주소가 기록되지 않은 경우에는 군 또는 면단위에서의 자료 통합을 위해서 토지소재지 동리 명을 그대로 주소로 표기하였다. 그러나 토지소재지의 군 ․ 면 ․ 동 명칭은 1914년 개편이후의 행정체제에 따랐기 때문에 타동민의 주소 표기와는 체제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토지조사부』 소유자 주소는 결과적으로 행정구역 개편 전후의 군 ․ 면 ․ 동체제가 혼재되어 있는 셈이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 군 ․ 면별 자료를 통합하고 소유자별로 정렬하여 주소를 재정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자료 이용에 있어서 이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소유자별로 살펴보면 國有地는 없고 모두 民有地이다. 고산동의 민유지 소유자는 총 165명이다. 이들 165명 가운데, 고산동을 주소로 한 토지 소유자는 103명,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소유자는 62명이다. 고산동 소유자의 성씨별 분포는 모두 11개 성씨로 宋氏 76명, 李氏 14명, 金氏 4명, 白氏 2명, 吉氏 ․ 朴氏 ․ 孫氏 ․ 魚氏 ․ 呂氏 ․ 吳氏 ․ 鄭氏 등 각 1명이다. 고산동을 주소로 한 소유자의 토지는 전 209필지 81,549평, 답 178필지 117,673평, 대지 97필지 15,517평, 임야 13필지 11,688평, 분묘지 1필지 170평, 지소 1필지 256평 등이다.
기타 및 특이사항
송인준(宋寅俊)은 초전면 고산동과 초전면 신풍동 2곳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의 성주군 초전면 고산동의 국유지와 민유지의 토지분포 상황, 개인 또는 門中, 書院, 鄕校, 私立學校 등의 토지소유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러나 『토지조사부』의 소유자가 곧 실재의 토지소유자가 아닌 경우도 있다. 같은 호에 거주하던 父子, 兄弟가 각각 토지신고서를 제출하기도 했고, 반대로 부자, 형제간의 개별 소유지를 한 사람의 이름으로 신고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分錄과 合錄은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던 오랜 관행이었다. 또한 宗中財産을 종손 개인의 이름으로 신고한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토지조사부』를 통해 당시의 소유 실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토지조사부』의 자료적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통해 1910년대의 전답분포나 토지소유현황 등 전반적인 추세를 살펴보는 데는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土地調査事業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식민지 지배를 위한 기초적 사업 가운데 하나였고, 『토지조사부』는 바로 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식민지지배 정책과 과정, 土地 ․ 林野의 침탈의 과정, 규모 등을 살필 수 있다. 실제로 『토지조사부』에는 조선총독부의 토지침탈 국책기관이었던 東洋拓植株式會社 또는 일본인들의 토지소유 상황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토지조사부』가 동리단위로 작성되었고, 또 소유자의 거주지가 1914년 府 ․ 郡 ․ 面 ․ 洞里 통폐합 이전의 행정구역명으로 기재되어 있어서 개편 이전의 면리동의 행정편제, 동리의 규모, 호수, 거주 성씨, 개인별 토지소유 현황 등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