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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성주군(星州郡) 성주면(星州面) 경산동(京山洞)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6+KSM-XD.1912.4784-20140630.T47840101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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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증빙류-토지대장
내용분류: 경제-농/수산업-토지대장
작성주체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작성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작성시기 1912
형태사항 크기: 27 X 19.5
장정: 합철
수량: 66
판식: 半葉匡郭, 有界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일본어
소장정보 원소장처: 성주군청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현소장처: 성주군청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안내정보

1912년 성주군(星州君) 성주면(星州面) 경산동(京山洞)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1912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照査局)에서 1912년 7월 30일부터 1912년 11월 29일까지 경상북도(慶尙北道) 성주군(星州郡) 성주면(星州面) 경산동(京山洞)의 전답(田畓)과 대지(垈地), 임야(林野), 분묘지(墳墓地), 지소(池沼) 등의 소유자로부터 토지신고서를 제출받아 지번(地番), 가지번(假地番), 지목(地目), 지적(地積, 坪), 소유자(所有者)의 주소와 성명, 적요(摘要) 등을 기록하여 작성한 토지장부이다.
『朝鮮土地調査事業硏究』, 愼鏞廈, 韓國硏究院, 1979
『朝鮮土地調査事業の硏究』, 宮嶋博史, 東京大學 東洋文化硏究所, 1991
『慶北마을誌』, 경상북도‧경북향토사연구협의회, 경상북도, 경북향토사연구협의회, 1991
『星州마을誌』, 성주문화원, 1998
『경상도 700년사』, 경상도 700년사 편찬위원회, 2006
「日帝下 朝鮮土地調査事業 計劃案의 變更過程」, 『史林』 32, 남기현, 수선사학회, 2009
1차 작성자 : 김인호

상세정보

1912년 朝鮮總督府 臨時土地照査局에서 慶北 星州郡 星州面 京山洞의 田畓과 垈地, 林野, 墳墓地 등의 소유자로부터 신고서를 제출받아 작성한 토지 장부
星州郡星州面京山洞土地調査簿
대상마을개관
경산동(京山洞)은 고려 건국초기부터 경산부(京山府)의 관청이 있던 곳으로 발전해왔으며 주요 관서와 상가, 시장이 위치한 성주읍(星州邑)의 요충지이다. 조선시대까지 성주군 용산면(龍山面)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경산동이 되어 8개 행정리로 구분되었으며 현재는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로 불린다.
경산동은 봉두산(鳳頭山)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이천(伊川)이 굽이쳐 동쪽으로 흐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사골[사동(社洞)], 과아태[구아터(舊衙터)], 사창앞(社倉앞), 서문밖(西門밖), 배리(裵里), 저자걸 등이 있다.
사골사동에서 유래된 것으로 사직단(社稷壇)의 제사를 관장하는 사직서(社稷署)가 현재 군청 서편 언덕위에 위치해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고려시대부터 성주의 호족이었던 성산배씨(星山裵氏)가 이 마을에 세거하고 있었다. 현재 성주초등학교 동편에 고려 말부터 관아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관아의 누각인 임풍루(臨風樓)가 1914년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사창앞은 사창(社倉)의 앞마을이라는 뜻이다. 고려 말부터 성산 사람 배규(裵規)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었으며 고려 명종(明宗)때 경산이씨(京山李氏)의 시조인 이덕부(李德富)가 입향 하였다. 또한 선조(宣祖) 때는 진주(晉州) 사람 강도창(姜道昌)이 입향 하였다. 이 마을에는 고려의 개국공신이며 성산이씨의 시조인 이능일(李能一)을 추모하는 성산재(星山齋)가 있으며 현재 관청 뒤쪽에는 조선 후기 대표적 유학자이고 독립운동가인 김창숙(金昌淑)을 기리는 심산기념관이 위치하고 있다. 서문밖은 성산읍성의 서문 고개 바깥부분을 뜻하는 곳으로 대표적 인물로는 이도장(李道長), 배동왕(裵東王)등이 있다. 과아터는 고려 초‧중기 관아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배리는 고려 말 성산 사람 배희보(裵希輔)가 세전한 터라 하여 붙여진 명칭으로 1520년 목사 김우(金祐)가 만든 남정(南亭)이 있다. 저자걸은 시장이 있던 곳이다.
경산리에는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호인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가 있다.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성주목사로 크게 공을 세우고 전사한 충의공(忠毅公) 제말(諸沫)과 그의 맏조카 제홍록(諸弘祿)의 공덕비이다. 칠원제씨(漆原諸氏)의 시조인 제말은 조선 전기의 의병장으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웅천(熊川), 김해(金海), 정암(鼎巖) 등지에서 왜군을 대파하여 큰 승리를 거두고 그 공으로 성주목사에 임명된 후 왜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의 조카 제홍록도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우고 충무공 이순신의 막하에 들어가 활약하다가 정유재란 때 전사하였다. 이밖에도 목사의 관사인 사시헌(四時軒)과 향시에 오른 생원‧진사들이 학문을 닦던 연계당(蓮桂堂) 등이 있다.
1912경산동에는 李氏, 金氏, 裵氏, 崔氏, 朴氏, 徐氏, 林氏, 鄭氏, 黃氏, 白氏, 柳氏, 申氏, 朱氏, 吳氏, 安氏, 孫氏, 權氏, 姜氏, 趙氏, 洪氏, 玄氏, 韓氏, 秋氏, 諸氏, 張氏, 史氏, 都氏, 盧氏, 吉氏, 河氏, 車氏, 陳氏, 池氏, 尹氏, 兪氏, 劉氏, 沈氏, 辛氏, 成氏, 卜氏, 卞氏, 方氏, 閔氏, 南氏, 羅氏, 孔氏, 曺氏 등 적어도 47개 이상의 성씨가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李氏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일본인으로 荒尾氏, 渡邊氏, 村田氏, 竹田氏, 竹林氏, 遠山氏, 西村氏, 相川氏, 三橋氏, 山川氏, 山本氏, 藤本氏, 龜川氏, 高木氏, 高橋氏, 江田氏 등이 있다.
자료의 내용
1912년 朝鮮總督府 臨時土地照査局에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전국의 토지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 때 개인의 전답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토지신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해야 했으며, 만약 토지신고서를 제출하지 않는 지주가 있으면 그의 소유지는 國有地로 편입되었다. 이 같은 조치에 따라 경북 성주군 성주면 경산동의 田畓과 垈地, 池沼, 林野, 墳墓地 등을 소유한 소유자들은 1912년 7월 30일부터 1912년 11월 29일까지 토지신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일제는 이를 근거로 『星州郡星州面京山洞 土地調査簿』를 만들었다.
토지신고서의 제출은 여성도 가능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남자들의 이름으로 신고하였다. 그 결과 어린이들이 신고주체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여자 이름이 공문서에 기재되는 것을 기피하였던 전통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경산동의 토지는 모두 762필지 167,893평이다. 이 가운데 田은 277필지 66,555평, 畓은 37필지 14,792평, 垈는 418필지 58,346평, 池沼는 2필지 3,109평, 林野는 24필지 19,665평, 雜種地는 3필지 4,560평, 社寺地는 1필지 866평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전이 답보다 필지 수에 있어서 7.4배, 면적에 있어서 4.4배 정도 많다.
『土地調査簿』의 所有者 住所欄은 혼란스러운 면이 있다. 토지 申告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직전에 이루어 졌기 때문에 소유자 주소는 행정구역 통폐합 이전의 〮군 ․ 면 ․ 동 체제에 따라 기재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성주군 대가면 용흥동의 옛 명칭인 本牙面 荷牙洞이 『토지조사부』에 보인다. 이 명칭은 1914년에 소멸되었지만,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자료 정리에 있어서 이런 경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소유자 주소란에 주소가 기재되어 있지 않는 경우이다. 이것은 소유자 주소와 토지 소재지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주소란이 공란으로 처리된 경우는 토지 소유자 또는 신고자가 本洞民임을 의미한다. 주소가 기록되지 않은 경우에는 군 또는 면단위에서의 자료 통합을 위해서 토지소재지 동리 명을 그대로 주소로 표기하였다. 그러나 토지소재지의 군 ․ 면 ․ 동 명칭은 1914년 개편이후의 행정체제에 따랐기 때문에 타동민의 주소 표기와는 체제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토지조사부』 소유자 주소는 결과적으로 행정구역 개편 전후의 군 ․ 면 ․ 동체제가 혼재되어 있는 셈이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 군 ․ 면별 자료를 통합하고 소유자별로 정렬하여 주소를 재정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자료 이용에 있어서 이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소유자별로는 國有地는 지소 29필지 24,280평 이고, 나머지는 모두 民有地이다. 경산동의 민유지 소유자는 총 357명이다. 이들 357명 가운데, 경산동을 주소로 한 토지 소유자는 312명이고 일본인은 16명이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소유자는 29명이다. 경산동 소유자의 성씨별 분포는 모두 46개 성씨로 李氏 80명, 金氏 61명, 裵氏 42명, 崔氏 17명, 朴氏 16명, 林氏 ‧ 徐氏 각 9명, 鄭氏 6명,黃氏 ‧ 白氏 각 5명, 申氏 4명, 朱氏 ‧ 柳氏 ‧ 吳氏 ‧ 安氏 ‧ 孫氏 ‧ 權氏 ‧ 姜氏 각 3명, 洪氏 ‧ 玄氏 ‧ 韓氏 ‧ 秋氏 ‧ 趙氏 ‧ 張氏 ‧ 史氏 ‧ 盧氏 ‧ 吉氏 각 2명, 河氏 ‧ 車氏 ‧ 陳氏 ‧ 池氏 ‧ 曺氏 ‧ 諸氏 ‧ 尹氏 ‧ 兪氏 ‧ 劉氏 ‧ 沈氏 ‧ 辛氏 ‧ 卜氏 ‧ 卞氏 ‧ 方氏 ‧ 閔氏 ‧ 都氏 ‧ 南氏 ‧ 羅氏 ‧ 孔氏 각 1명이다. 경산동을 주소로 한 소유자의 토지는 전 238필지 49,833평, 답 23필지 6,334평, 대지 391필지 46,260평, 임야 13필지 5,307평, 지소 2필지 3,109평 등이다.
기타 및 특이사항
경산동 本洞所有地로 임야 4필지 8,824평이 있으며 관왕묘에서 전 3필지 755평, 답 2필지 5,220평, 임야 3필지 3,866평, 社寺地 1필지 866평을 소유하고 있다. 성주면 경산동徐相孝가 대지 1필지 294평을 가지고 있는데, 공유자가 4명이 되고 그 명단이 기록 되어 있다. 일본인의 경우 총 16명이 전 43필지 9,680평, 답 1필지 1,060평, 대지 38필지 4,434평, 임야 1필지 57평, 지소 1필지 1,260평을 소유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의 성주군 성주면 경산동의 국유지와 민유지의 토지분포 상황, 개인 또는 門中, 書院, 鄕校, 私立學校 등의 토지소유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러나 『토지조사부』의 소유자가 곧 실재의 토지소유자가 아닌 경우도 있다. 같은 호에 거주하던 父子, 兄弟가 각각 토지신고서를 제출하기도 했고, 반대로 부자, 형제간의 개별 소유지를 한 사람의 이름으로 신고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分錄과 合錄은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던 오랜 관행이었다. 또한 宗中財産을 종손 개인의 이름으로 신고한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토지조사부』를 통해 당시의 소유 실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토지조사부』의 자료적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통해 1910년대의 전답분포나 토지소유현황 등 전반적인 추세를 살펴보는 데는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土地調査事業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식민지 지배를 위한 기초적 사업 가운데 하나였고, 『토지조사부』는 바로 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식민지지배 정책과 과정, 土地 ․ 林野의 침탈의 과정, 규모 등을 살필 수 있다. 실제로 『토지조사부』에는 조선총독부의 토지침탈 국책기관이었던 東洋拓植株式會社 또는 일본인들의 토지소유 상황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토지조사부』가 동리단위로 작성되었고, 또 소유자의 거주지가 1914년 府 ․ 郡 ․ 面 ․ 洞里 통폐합 이전의 행정구역명으로 기재되어 있어서 개편 이전의 면리동의 행정편제, 동리의 규모, 호수, 거주 성씨, 개인별 토지소유 현황 등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朝鮮土地調査事業硏究』, 愼鏞廈, 韓國硏究院, 1979
『朝鮮土地調査事業の硏究』, 宮嶋博史, 東京大學 東洋文化硏究所, 1991
『慶北마을誌』, 경상북도‧경북향토사연구협의회, 경상북도, 경북향토사연구협의회, 1991
『星州마을誌』, 성주문화원, 1998
『경상도 700년사』, 경상도 700년사 편찬위원회, 2006
「日帝下 朝鮮土地調査事業 計劃案의 變更過程」, 『史林』 32, 남기현, 수선사학회, 2009
1차 작성자 : 김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