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7년(憲宗 13) 7월에 慈山府使 李源祚의 戶奴인 申得이 관찰사에게 올린 上典의 휴가를 청하는 내용의 所志이다.
1847년(憲宗 13) 7월에 慈山府使 李源祚의 戶奴인 申得이 관찰사에게 올린 所志로서, 上典의 휴가를 신청하는 청원을 담고 있다. 李源祚는 같은 해 2월에도 휴가를 청한 바 있다.(1847년 자산부사(慈山府使) 이원조(李源祚) 호노(戶奴) 신득(辛得) 소지(所志)-1)
본 소지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奴 본인의 上典의 本宅은 慶尙道 星州 땅에 있습니다. 지금 掃墳(성묘)하려고 하니, 갔다 돌아오는 기간 동안 말미를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요청에 대해 경상도관찰사는 같은 달 9일에 ‘말미를 허락한다고 알려줄 것’이라고 처분하였다.
李原祚(1792~1872)(1792~1871)는 자가 周賢이며, 호는 凝窩이다. 초명은 李永祚이고, 1812년에 개명하였다. 생원 李亨鎭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李奎鎭의 양자가 되었다. 18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제주목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여,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에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1품의 반열에 올랐다. 학문적으로는 영남 주리론 계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鄭宗魯와 柳致明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성리학 사상은 조카 李震相에게 전해졌다.
본 所志와 관련된 그의 관력을 보면, 1809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후 승문원 박사에 임명되지만 1816년 파직을 당한다. 하지만 1817년 敍用 되고 예·병조 좌랑, 제주 목사, 좌승지, 우부승지 등의 벼슬을 역임한다. 이후 우부승지에서 遞職되지만 그 다음해에 慈山府使에 임명된다. 그는 약 2년간 慈山을 관리하였으나 1848년 5월 28일 병으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해 파직을 당하게 된다.
1차 작성자 : 명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