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5월 12일, 권노섭이 자신이 가르치게 된 상대 아들과 관련하여 표곡에 보낸 편지
1934년 5월 12일에 一軒 權魯燮(1899~1946)이 자신이 가르치게 된 상대 아들과 관련하여 보낸 편지이다. 먼저, 權魯燮은 자신이 溪上의 李 君子에게 지우를 입은 데다 지금은 또 상대의 아낌을 받아서 古家 출신의 賢碩의 반열에 자신이 따를 수 있게 되었으니, 두 분이 아니면 자신은 달리는 고깃덩이와 같이 아무짝에 쓸모없는 사람일 뿐일 것이라고 하였다. 權魯燮도 冲齋 權橃의 후손이므로 家格으로 보면 전혀 뒤지지 않으니, 이는 어디까지나 古人이 편지에서 흔히 쓰는 겸사의 하나이다. 이어, 그러면서도 편지를 늘 상대가 먼저 보내도록 하였으므로 자신은 늘 마음이 편치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어 상대가 스스로를 잘 수양하여 그 선조인 壽靜齋 柳鼎文 先生의 遺緖를 더욱 빛내고 있느냐며 안부를 물었다.
權魯燮 자신은 자식 된 직분은 잘 하지 못하면서 조상의 亭子(본 편지의 피봉에 기재되어 있는 水亭 곧 寒水亭으로, 權橃의 손자인 權來가 건립한 것)에 기거하여 조금이나마 속세의 분화함은 면하고, 泉石으로 흉금을 씻어내고 좋은 벗들과 함께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나누니, 일상의 좋은 흥취가 깊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십 수 년 동안에 자신이 고심하여 힘써왔던 것에 아무런 보람이 없다고 하였다. 이어, 상대의 아들이 아주 먼 길을 師友를 따라 왔으니 그 역량과 기백은 요즘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言論과 趨向이 매우 특출하니, 참으로 좋은 가문에 凡人이 나오지 않음을 알겠다고 하였다. 진실로 시종 이러한 길을 얻어 탁연히 성취한다면 사람들은 吾黨에 훌륭한 사람이 있음을 축하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끝으로, 李潤德(響山 李晩燾의 曾孫)이 그 再從大父의 喪을 당하여 며칠 전에 돌아갔는데, 初終 뒤에는 곧바로 돌아올 수 있을 듯하다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상대 아우 등의 안부를 물으면서 자신이 바빠서 따로 편지를 보내지 못하였기에 매우 안타깝다고 하였다. 또한 景勳 씨에게도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