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9월 그믐 전날, 김형칠이 사돈인 류호집에게 虎溪書院의 일과 관련하여 보낸 편지
1934년 9월 그믐 전날에 天游 金衡七(1874~1959)이 사돈인 半啞 柳顥集(1887~1945)에게 虎溪書院의 일과 관련하여 보낸 편지이다.
먼저, 상대가 지난번에 星峽에 갔다가 돌아왔을 줄로 생각된다고 하면서, 그때 함께 다니면서 며칠 동안 그곳에서 노닐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다. 하늘이 기회를 줘도 늘 일로 인하여 구속을 받게 되니, 언제쯤이면 굴레에서 벗어나게 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이어, 상대의 안부를 물었다. 金衡七 자신은 오른쪽 광대뼈와 턱이 6, 7일 동안이나 아파서 먹고 마시는 데에 크게 지장이 있으니, 매우 괴롭다고 하였다. 다만 어버이께서는 다행히 병환이 없다고 하였다.
虎溪書院의 일은 일종의 근거 없는 의논이 아직 잠잠해지지 않고 있으니, 너무나도 염려스럽다고 하였다. 지혜가 없어서 일을 처리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하여금 祭享을 빙자하여 殘物을 보관하게 한다면, 분수를 넘은 제사를 泰山이 歆饗하지 않는 것처럼 제대로 書院의 祭祀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곳의 유생들은 孟子의 黜享을 막기 위하여 죽을 각오를 다졌던 錢唐처럼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嶺東에서 만약 雷同하는 의논을 제기하면 통절히 억제하여 다시 제기되지 못하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虎溪書院의 운영을 둘러싸고 일종의 잡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구체적인 내막은 이 편지만으로는 살필 수 없다. 끝으로, 내일이 상대의 생일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祝壽하였다.
발급인 金衡七은 자는 聖齊, 호는 天游이고 본관은 義城, 본적은 安東이다. 아버지는 金秉植이고 靑溪 金璡의 冑孫이다. 수취인 柳顥集은 자가 伯昇, 호가 半啞이고 본관은 全州이고 본적은 安東이다. 柳淵楫, 李晩燾의 문인이고 奮山 柳淵鱗의 장남이다. 그는 『안동 독립운동가 700인』에 올라 있는데, "1910년 나라를 잃은 직후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이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혹형을 당했다고 전해지는데, 의용단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저서로는 『半啞遺稿』가 전해진다.
이 편지는 호계서원의 제사와 임원에 관련된 것으로 보이나 그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하지만 편지의 발급자인 金衡七은 錢唐이 孟子의 黜享을 막은 고사, 『論語』「八佾」에서 孔子가 泰山의 제사와 관련하여 冉孺를 질책하는 고사를 이용해 강력히 비판하였다. 또한 향촌에서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자신들과 혼인으로 맺어진 전주류씨와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