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6월 21일, 김형칠이 수해 및 혼인 신고와 관련하여 류호집에게 보낸 편지
1934년 6월 21일에 天游 金衡七(1874~1959)이 수해 및 혼인 신고와 관련하여 사돈인 半啞 柳顥集(1887~1945)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재앙이 닥친 시절에 柳積勳(류호집의 아들, 七休堂 柳寔勳의 동생)이 자신을 방문해 준 것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였다. 또한 그를 통해서 상대가 홀로 수해를 면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일단 축하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직 구름이 두껍게 겹쳐 있는 등 기상이 좋지 않다고 하면서, 제방과 도랑을 정리하여 대비하라고 당부하였다.
김형칠은 늙으신 어버이께서 덥고 습한 계절을 맞아 지내시기가 더욱 힘드신 데다 요사이 여름감기를 앓으시는 것 같다고 하면서 애타는 마음을 전하였다. 또한 김형칠 자신도 날마다 孱僮들과 더불어 도랑을 뚫고 둑을 쌓는 일을 하고 있는데 겨우 동쪽을 막으면 서쪽이 터졌다고 하는 상황이라고 하면서, 『書經』의 말을 인용하여 "禹王이 검은 圭를 올려 舜에게 成功을 아뢰었다는 것은 과연 어떠한 역량이란 말입니까"라며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혼인신고서와 호적초본을 올린다고 하면서, 채워서 써넣을 부분은 두 사람의 필적으로 하지 말며 여기의 성명란도 모두 류호집이 채워서 써넣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아울러 도장도 동봉해서 올린다고 하고 부인의 도장은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하면서, "昌" 1자를 새겨서 사용하시고 사용하고 나서는 곧 모두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저께 비가 내린 뒤로 앞 시내의 수위 변화를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류적훈이 기어이 떠나갔다고 하면서, 이는 자신의 집에 대접할 것이 없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니 매우 신경이 쓰인다고 하였다.
발급인 김형칠은 자가 聖齊이고, 호는 天游이다. 아버지는 秉植이고, 안동에 거주하였다. 본관은 義城으로, 靑溪 金璡의 胄孫이다. 그의 딸인 義城金氏(金時娟)가 류호집의 장남인 류식훈에게 시집가서 柳仲坤 등을 낳았다. 곧 김형칠과 류호집은 사돈지간이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