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4월 6일, 김종구가 근황을 전하기 위해 장인인 류연린에게 보낸 편지
1933년 4월 6일에 檀汕 金鍾九(1891~1974)가 근황을 전하기 위해 장인인 奮山 柳淵鱗(1868~1939)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류연린이 어루만져 주고 보살펴 주는 깊은 뜻에서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주었으나 자신은 안부 인사를 여쭐 겨를이 없었다고 하면서, 류연린이 자신의 형편을 헤아려 주실 줄로 생각되기는 하여도 죄송한 마음은 이루 다 말씀드릴 수 없다고 하였다. 보내준 편지를 읽고서 류연린이 평안한 줄을 알게 되어 위안이 되었으나, 남은 근심이 아직 해소되지 않고 있다는 손자에 대해서는 염려의 뜻을 전하였다.
김종구 자신은 상을 당하고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으며 큰일을 치르고 난 여파가 남아 있어 수습할 방도가 없다고 하였다. 집안의 어른께서 병이 악화되지 않은 것이 현재 다행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내가 지난번에 洪이 조제한 약을 복용한 뒤에 효험을 보았으나 어제 저녁부터 다시 寒氣를 얻어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걱정스런 마음을 전하였다. 조만간 아들이 홍에게 가서 병증을 물어 병의 뿌리를 타파할 방도를 물어보고자 하지만 氣血의 상태로 볼 때 쉽게 완치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김종구는 피차가 확실하게 정하였으니 결단코 갑자기 변경하여 좋은 인연을 놓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혼처를 정하는 일과 관련하여 언급한 것으로 보이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김종구는 親山을 이장하는 일로 堪輿家를 불러다가 온종일 두루 돌아다니느라 심신을 정돈할 여가가 없다고 하면서, 어느 쪽으로 결정이 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끝으로, 水谷의 장사를 치르는 날이 머지않았으니 직접 나아가 묘소에서 영결하고자 한다면서 그때 류연린을 찾아뵐 생각이지만 때에 임박하여 헤살이 생기지 않을지는 모르겠다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아드님에게는 황망하여 따로 편지를 써서 보내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매우 안타깝다고 하였다.
이 편지의 발급인 김종구의 본관은 光山이고 자는 國聲이며 호는 檀汕이다. 光山金氏 禮安派 胄孫(後凋堂 金富弼의 胄孫)으로 한학자이다. 陶山書院 원장을 비롯하여 안동 지역 여러 서원의 원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檀汕集』이 있다. 그는 奮山 류연린의 사위이다. 全州柳氏와의 사이에 金昌漢, 金澤鎭, 金世漢 등의 자식을 두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