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9월 21일, 김형칠이 근황을 전하기 위해 류연린에게 보낸 편지
1933년 9월 21일에 天游 金衡七(1874~1959)이 근황을 전하기 위해 奮山 柳淵鱗(1868~1939)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일전에 伯振(所安 柳東麟)을 잠시 만나서 류연린이 星楸(壽靜齋 柳鼎文의 묘소가 있는 英陽의 七星峯을 가리키는 듯함)에서 성묘를 하고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면서, 류연린의 건강과 체력에 대해 경탄하는 마음을 전하였다. 곧 류연린을 冷然한 바람을 타고 하늘을 돌아다녔던 列子라 부르고 싶을 정도라고 하였다.
김형칠 자신은 오늘 東林에 성묘하러 갔더니 황폐한 언덕에 가득한 서리의 찬 기운이 눈앞에 온통 처량했다고 하였으며, 저물녘에 돌아와서 피곤으로 누웠다고 하였다. 늙으신 어버이께서는 별다른 병환은 없으시나 기력이 점점 없어지고 계시므로 매우 애가 탄다고 하였으며, 다른 가족들은 한결같다고 하였다.
근래 孤山 黃耆老의 문집을 빌려서 일이 없을 때 조금씩 보고 있다고 하였는데, 그 주장은 굳세어 敬服할 만할 뿐만 아니라 그 문장은 淸越하고 疏散하다고 하면서 호평하였다. 이어 구체적으로 황기로의 작품들을 언급하였다.
끝으로, 류연린을 모시고 마음 맞는 한두 사람들과 함께 산수에서 노닐고 싶다는 뜻을 전하면서, 어버이 시탕으로 인하여 그러한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時祀가 다 끝난 뒤에 달리 구애되는 일이 없으면 류연린을 한 번 방문하여 회포를 풀 생각이라고 하였다.
발급인 김형칠은 자가 聖齊이고, 호는 天游이다. 아버지는 秉植이고, 안동에 거주하였다. 본관은 義城으로, 靑溪 金璡의 胄孫이다. 그의 딸인 義城金氏(金時娟)가 류호집의 장남인 류식훈에게 시집가서 柳仲坤 등을 낳았다. 곧 김형칠과 류호집은 사돈지간이다. 이 편지에서 김형칠이 자신을 査下生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수신자는 류호집의 부친인 류연린일 것으로 보인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