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1월 24일, 김종구가 金生의 筆跡을 보내달라는 일로 류호집에게 보낸 편지
1925년 1월 24일에 檀汕 金鍾九(1891~1974)가 金生의 筆跡을 보내달라는 일로 半啞 柳顥集(1887~1945)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장인어른이신 柳淵鱗의 뜻밖의 방문에 대해 기뻤던 마음을 언급하고, 그를 통해서 장모님께서 작년의 병환이 새해를 맞이하는 즈음에 완쾌되었음을 알게 되니 진실로 다행스러웠다고 했다. 그러나 柳顥{氵+策}이 약효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매우 염려스럽다고 하였다. 또한 근자에 兩家에서 喪故를 거듭 당하고 있으니 소식을 듣고서 매우 놀라운데, 연달아 큰일을 당함에 어떻게 버티고 지내느냐며 위로의 말을 전하였다. 金鍾九 자신은 유행성 독감으로 며칠 동안 앓다가 지금에야 병세가 좋아졌지만 어느 때야 완전히 건강해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하였다. 마마 기운이 치성하여 아직 그것을 치르지 않은 아이들 걱정으로 골치가 아프다고도 하였다. 장인어른께서 下溪에서 이틀 밤을 지내신 뒤에 돌아가시는 길에 霞洞 할아버님과 함께 오셨는데 다소 후하게 대접해 드리지 못한 것과 오랫동안 머무르시지 못한 것에 대해 송구한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였다. 무사히 집으로 도착하셨는지도 물었다. 이어, 이사하는 일의 경과를 간략히 언급하고 柳顥集과 사전에 충분히 의논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하면서, 봄이 되어 따뜻해진 뒤에 왕림하여 도와주고 아울러 쌓인 회포를 풀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어서 전에 부탁드렸던 金生의 筆跡에 대해 이번에 자신도 장인어른께 말씀드렸더니 보관해 두고 있던 2폭을 지금 돌아가면 나눠 주겠다고 하셨다고 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표하였다. 退筆은 연전에 1폭을 올렸으나 부족한 감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2장을 다시 올린다고 하였으며, 淸風 書法 1장도 아울러 올린다고 하였다. 끝으로, 자신이 이렇게 退筆 등을 보내준 정성을 잘 감안하여 그에 상응하도록 金生의 筆跡을 많이 보내달라고 하였는데 장인어르신도 5, 6행은 보내라고 하겠다고 하셨으니 만약 2, 3행에 그친다면 차라리 보내지 말라고도 하였다. 잘 구경한 뒤에 온전하게 돌려줌으로써 柳顥集이 金生 筆跡을 아끼는 마음에 부응할 것이라고도 하였다.
발급인 金鍾九은 자는 國聲, 호는 檀汕이고 본관은 光山, 본적은 安東이다. 光山金氏 禮安派 冑孫으로 한학자이다. 陶山書院 원장을 비롯하여 안동 지역 여러 서원의 원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檀汕集』이 있다. 그는 奮山 柳淵鱗의 사위이다. 全州柳氏와의 사이에 金昌漢, 金澤鎭, 金世漢 등의 자식을 두었다. 수취인 半啞 柳顥集은 柳淵鱗의 장남이다. 자는 伯昇, 호는 半啞이고 본관은 全州, 본적은 安東이다. 李晩燾의 문인으로 저서로는 『半啞遺稿』가 있다. 志行이 簡潔하며 家訓을 충실히 실천한 인물로 평가되었다.
이 편지는 전주류씨와 광산김씨 사이에 교류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이 두가문은 혼맥으로 맺어져 있었으며 어려운 일이 발생할 때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영남 지역의 사족들은 혼인을 통해 향촌사회에서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했던 것이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