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21일, 김형칠이 사돈인 류호집에게 靑邱稧와 관련하여 보낸 편지
1923년 21일에 天游 金衡七(1874~1959)이 사돈인 半啞 柳顥集(1887~1945)에게 靑邱稧와 관련하여 보낸 편지이다.
먼저,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자신의 현재 상황을 전하고 있다. 늘 상대로부터 편지를 받을 때마다 편지에서 상대가 바른 말로 자신을 꾸짖고 실없는 말로 용기를 주는 것이 마치 시골 늙은이가 어린 손자를 가르치는 것 같으니 송연해졌다가 번번이 다시 웃게 된다고 하였다. 이어서, 보내신 편지를 읽고서 상대가 건승하고 북쪽으로 갔다가 무사히 도착한 줄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상대가 늙어서도 더욱 건강하니, 신선이 수명을 늘리는 방법을 터득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냐고 하였다. 金衡七 자신은 차가운 기운을 마시고 숨을 헐떡이고 있다고 하였다.
본론에서는 靑邱稧가 제 모습을 과연 갖추었는지 물었다. 자신들이 만약 響翁 즉 李晩燾의 일에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후생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靑邱稧는 響山 李晩燾를 추모하기 위해 당시 후인들이 조직한 계이고 靑邱는 李晩燾가 자정순국한 곳으로 현재 예안면 인계리 청구마을을 의미한다. 끝으로, 방문해 달라는 상대의 청에 대해서 멀리선 온 손님이 떠나기 전에는 방문하기 어렵다고 하면서도 조만간 방문할 것이라고 생각을 전하였다.
발급인 金衡七은 자는 聖齊, 호는 天游이고 본관은 義城, 본적은 安東이다. 아버지는 金秉植이고 靑溪 金璡의 冑孫이다. 그의 딸인 金時娟은 半啞 柳顥集의 장남인 七休堂 柳寔勳에게 시집가서 柳仲坤 등을 낳았다. 수취인 柳顥集은 자가 伯昇, 호가 半啞이고 본관은 全州이고 본적은 安東이다. 柳淵楫, 李晩燾의 문인이고 奮山 柳淵鱗의 장남이다. 그는 『안동 독립운동가 700인』에 올라 있는데, "1910년 나라를 잃은 직후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이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혹형을 당했다고 전해지는데, 의용단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저서로는 『半啞遺稿』가 전해진다.
이 편지를 통해 안동 지역의 사족들이 서로간의 稧를 통해 향촌 사회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편지에 등장하는 靑邱稧는 眞城人 李晩燾를 추모하기 위한 계로 李晩燾는 柳顥集의 아버지 柳淵鱗(1868~1939)의 장인이었다. 즉 柳顥集은 李晩燾의 외손이었다. 또한 의성김씨와 전주류씨는 靑溪 金璡 때부터 혼인으로 맺어진 집안으로 총 3차례의 黃山稧를 통해 혈연적 감정을 돈독히 하였다. 안동의 사족들은 지속적인 계를 통해 혈연적으로 맺어진 서로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