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3월 17일, 금석기가 자신의 근황과 곡식의 가격, 안석이 경작하던 논에 관한 문제 등을 알리기 위해 숙부인 琴祜烈에게 보내는 편지
1922년 3월 17일, 조카인 琴錫基(1865-1924)가 자신의 근황과 곡식의 가격, 安石이 경작하던 논에 관한 문제 등을 숙부인 琴祜烈에게 알리면서 답장을 요청하기위해 보내는 편지이다.
처음, 상대방과 어느덧 한 달이나 연락하지 못하여 답답한 마음 형용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자신은 감기로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또 한 가족 모두가 병을 옮겨 한 달 남짓 정신없이 지냈다가 지금 겨우 나았으며, 한편 조카 達이 일전에 새로 태어난 아들을 잃었고, 앞집 賢井 형의 어머니가 이번 달 1일에 별세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어, 이번 봄에 곡식 가격이 아직 정해진 값이 없고 지난 달 초는 날벼[日稻]가 한 섬에 8, 9환[圓]이라고 하고, 그 후 떨어져 7환으로 정해졌다고 하더니, 근래에 또 8환으로 정해졌다고 하였다. 곡식 상인은 혹 한두 명 왕래하기는 하지만 아직 분명히 사려는 사람은 없다고 하였다. 먼 마을은 얼마 전에는 8환80전으로 매매되었고, 묵은 벼[舊禾]는 아직 매매가 없다고 하였다.
安石이 경작하던 內室의 논은 섣달 下訥의 金用伊에게 이작하였다고 하였다. 안석의 처가 수차례 와서 말하여서 "나는 본래 모른다. 금곡의 처분이 이와 같기 때문에 나는 시행했을 뿐이다."라고 답했다고 하였다. 안석은 지난 그믐 무렵 解役되어 비로소 돌아왔고 그 처는 이미 지난 달 보름에서 20일 간에 가만히 스스로 논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김용이가 와서 "이 무슨 까닭인가?"라고 하여 자신은 모를 뿐이라고 했다고 하였다. 김용이는 근래에 상처까지 하였고 또 김용이의 사람됨이 무능하여 안석의 처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김용이에게 편을 들려고 하면 안석도 또한 수년 동안 잘 지내던 처지여서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없고, 안석에게 돌려주고자 하면 그가 억지를 부릴 것이 두렵고, 또 공연히 김용이에게 실없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고 하였다. 김용이가 비록 상처하였더라도 농사지을 수 있고, 안석도 또한 부역을 면하고 돌아와 농사지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사정을 말하면서 상대방에게 이것을 잘 헤아린 뒤에 이번 곡우 전에 답장을 해 주셔서 모판을 만질 수 있도록 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끝으로, 자신 주변의 여러 소식을 전했는데, 下訥의 明先의 논은 이미 내다 팔았는데 값이 3천3백50냥이라고 하였다. 명선은 지난 달 보름 전에 상경했고, 慶은 中東學校를 반드시 졸업할 터인데 이후에 장차 거취를 어떻게 할 것이며 거주를 어디로 할 것인지 물어보면서 숙부에게도 의견을 듣고 싶다고 하였다.
추신으로, 石灘은 아직 타작을 하지 않았지만 거둘 방법이 만무하다고 하였고, 宋溫溪 또한 이러저러한 이유로 갚을 생각이 없는듯하다고 하였다. 김용이와 안석은 서로 고집하며 양보하지 않는 경우라 할 수 있으니 바로 다시 牌子를 내린 이후라야 일이 올바르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앙판하는 것이 매우 급하니 헤아려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 편지는 피봉이 없어 이를 통한 수취인 정보는 알 수 없다. 문두에 ‘숙부께 올리는 편지’라고 되어 있는데,「奉化琴氏世譜」에 의하면 발급자인 금석기의 숙부는 琴祜烈(1853~1925)이다. 따라서 수취인을 금호열로 보았다. 금호열은 자는 景受이며, 梅軒 琴輔(1521-1584)의 10代 주손이다. 금석기는 初諱는 中基이고, 자는 洛彦이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