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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금석기(琴錫基)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5+KSM-XF.1922.4792-20130630.02592570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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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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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금석기, 금호열
작성지역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문촌리
작성시기 1922
형태사항 크기: 18.2 X 74.7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태자 봉화금씨 매헌종택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922년 금석기(琴錫基) 서간(書簡)
1922년 3월 17일, 조카인 금석기가 자신의 근황과 곡식의 가격, 安石이 경작하던 논에 관한 문제 등을 알리기 위해 숙부인 금호열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자신은 감기로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어, 이번 봄에 곡식 가격이 아직 정해진 값이 없고 지난 달 초는 날벼가 한 섬에 8, 9환이라고 하고, 그 후 떨어져 7환으로 정해졌다고 하더니, 근래에 또 8환으로 정해졌다고 하였다. 안석이 경작하던 內室의 논은 섣달 하눌김용이에게 이작하였다고 하였다. 김용이는 근래에 상처까지 하였고 또 김용이의 사람됨이 무능하여 안석의 처를 감당할 수가 없지만 김용이가 농사를 지을 수 있고, 안석도 또한 부역을 면하고 돌아와 농사지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사정을 말하면서 상대방에게 이것을 잘 헤아린 뒤에 이번 곡우 전에 답장을 해 주셔서 모판을 만질 수 있도록 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선주

상세정보

1922년 3월 17일, 금석기가 자신의 근황과 곡식의 가격, 안석이 경작하던 논에 관한 문제 등을 알리기 위해 숙부인 琴祜烈에게 보내는 편지
1922년 3월 17일, 조카인 琴錫基(1865-1924)가 자신의 근황과 곡식의 가격, 安石이 경작하던 논에 관한 문제 등을 숙부인 琴祜烈에게 알리면서 답장을 요청하기위해 보내는 편지이다.
처음, 상대방과 어느덧 한 달이나 연락하지 못하여 답답한 마음 형용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자신은 감기로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또 한 가족 모두가 병을 옮겨 한 달 남짓 정신없이 지냈다가 지금 겨우 나았으며, 한편 조카 이 일전에 새로 태어난 아들을 잃었고, 앞집 賢井 형의 어머니가 이번 달 1일에 별세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어, 이번 봄에 곡식 가격이 아직 정해진 값이 없고 지난 달 초는 날벼[日稻]가 한 섬에 8, 9환[圓]이라고 하고, 그 후 떨어져 7환으로 정해졌다고 하더니, 근래에 또 8환으로 정해졌다고 하였다. 곡식 상인은 혹 한두 명 왕래하기는 하지만 아직 분명히 사려는 사람은 없다고 하였다. 먼 마을은 얼마 전에는 8환80전으로 매매되었고, 묵은 벼[舊禾]는 아직 매매가 없다고 하였다.
安石이 경작하던 內室의 논은 섣달 下訥金用伊에게 이작하였다고 하였다. 안석의 처가 수차례 와서 말하여서 "나는 본래 모른다. 금곡의 처분이 이와 같기 때문에 나는 시행했을 뿐이다."라고 답했다고 하였다. 안석은 지난 그믐 무렵 解役되어 비로소 돌아왔고 그 처는 이미 지난 달 보름에서 20일 간에 가만히 스스로 논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김용이가 와서 "이 무슨 까닭인가?"라고 하여 자신은 모를 뿐이라고 했다고 하였다. 김용이는 근래에 상처까지 하였고 또 김용이의 사람됨이 무능하여 안석의 처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김용이에게 편을 들려고 하면 안석도 또한 수년 동안 잘 지내던 처지여서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없고, 안석에게 돌려주고자 하면 그가 억지를 부릴 것이 두렵고, 또 공연히 김용이에게 실없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고 하였다. 김용이가 비록 상처하였더라도 농사지을 수 있고, 안석도 또한 부역을 면하고 돌아와 농사지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사정을 말하면서 상대방에게 이것을 잘 헤아린 뒤에 이번 곡우 전에 답장을 해 주셔서 모판을 만질 수 있도록 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끝으로, 자신 주변의 여러 소식을 전했는데, 下訥明先의 논은 이미 내다 팔았는데 값이 3천3백50냥이라고 하였다. 명선은 지난 달 보름 전에 상경했고, 은 中東學校를 반드시 졸업할 터인데 이후에 장차 거취를 어떻게 할 것이며 거주를 어디로 할 것인지 물어보면서 숙부에게도 의견을 듣고 싶다고 하였다.
추신으로, 石灘은 아직 타작을 하지 않았지만 거둘 방법이 만무하다고 하였고, 宋溫溪 또한 이러저러한 이유로 갚을 생각이 없는듯하다고 하였다. 김용이안석은 서로 고집하며 양보하지 않는 경우라 할 수 있으니 바로 다시 牌子를 내린 이후라야 일이 올바르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앙판하는 것이 매우 급하니 헤아려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 편지는 피봉이 없어 이를 통한 수취인 정보는 알 수 없다. 문두에 ‘숙부께 올리는 편지’라고 되어 있는데,「奉化琴氏世譜」에 의하면 발급자인 금석기의 숙부는 琴祜烈(1853~1925)이다. 따라서 수취인을 금호열로 보았다. 금호열은 자는 景受이며, 梅軒 琴輔(1521-1584)의 10代 주손이다. 금석기는 初諱는 中基이고, 자는 洛彦이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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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922년 금석기(琴錫基) 서간(書簡)

叔父主前上白書。

居然一朔阻矣。伏鬱難狀。未審
花煦。
兩位分氣體候。保無添損。渾節
一例否。伏慕不任。舍侄。自正念間。
爲感所祟。高歇無常。且一率
網打流行。澒洞月餘。今才稍稍擧
頭。村內無人不痛。而侄。日前見
失新生男。寃矣何言。前家賢井
兄恃。以無何症。今月初一日別世。環
顧門內。長老晨星。嘆何如之。就白。
今春谷價。姑無完定。前月初。則日
稻一石。八圓九圓云矣。其後落下。七圓
刻數云云。近又八圓刻數云。谷商或
有一二往來。而姑無的礭願買者。
則日前以八圓八十錢賣買云耳。
舊禾則高下間姑無賣買耳。安石
所作於內室畓。臘月移作於下訥金用伊
矣。安石妻數次來言。而答之以我本不知
也。金谷處分如是。故我則施行而已云矣。
安石則前晦間解役始還。而其妻則
已於前月望念間。潛自治畓。金用伊
來言。此何故也云云。亦答之以吾不知耳。
大氐此事甚難處也。金用伊近又喪
妻。且金之爲人無能。不能當安之妻。
而欲袒於金。則安亦多年好面之地。不可
恝之。欲還於安。則畏其抑之。而且空然示
不實於金也。金雖喪妻。可力農也。安
亦解還。則可力農也。左右間下諒後。以
今穀雨前回下敎。以爲使治秧坂。伏望
耳。崔後日及其他錢兩條。一無來
納者耳。下訥明先畓已放賣。而價則三千三
百五十兩耳。明先前月望前上京耳。
阿必卒業於中東校。而此後去就。
將何居也。叔父行旆。當在卽間也。願聞耳。
餘在續后。不備白。
壬戌 三月 十七日。舍侄 錫基 上白是。

石灘姑未打作。而萬無可捧之道。宋溫溪
亦此頉彼頉。似無報償之意耳。
金也安也可謂相持。則卽日更下牌。然後可歸正耳。
秧坂太急。下諒伏望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