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2월 18일, 宜齋 姜泌이 근황을 전하기 위해 奮山 柳淵鱗에게 보낸 편지
1922년 2월 18일에 宜齋 姜泌(1878~1942)이 근황을 전하기 위해 奮山 柳淵鱗(1868~1939)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자신의 傾仰하는 정성은 늘 간절하였으나 안부를 묻는 예를 빠트린 지 여러 해가 되었다고 하면서 상대의 용서를 바랄 수도 없다고 하였다. 이어, 상대 형제 및 상대의 아들, 손자, 同堂 여러 사람의 안부를 물었다. 姜泌은 늙으신 어버이가 평안하게 지내지 못하고 병중에 있는 것이 자신이 調養해 드리는 데에 정성이 없는 데에 기인하는 것이라며 자책감을 드러내고, 아울러 하루도 애를 태우지 않고 지내는 날이 없다며 통박한 심정을 전하였다. 다만 지난해 12월에 손자를 얻고 지난달에는 며느리를 맞았으니, 이런 일들이 약간 즐거움을 주고 있다고 하였다.
姜泌 자신은 公私 여러모로 세상일의 침노를 받아서 갈수록 버티어 내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래서 허약한 체질의 몸이 일찍 노쇠하고 질병이 이를 따라 생겨나서 사는 맛이 없다고 하였다. 방문하려는 생각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으나 앞에서 언급한 자신의 사정상 부모 곁을 떠나기가 실로 어렵다고 하면서, 너그럽게 용서해 달라고 우회적으로 양해를 구하였다. 끝으로, 柳致好의 曾孫인 一汝[柳東夔] 君이 종종 자신을 기쁘게 방문해 주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그가 돌아가는 편에 바쁜 일을 제쳐 놓고 이렇게 안부 편지를 보낸다고 하였다.
宜齋 姜泌은 白樵 姜夏奎의 손자이자, 晩山 姜鎔의 아들이다. 姜鎔은 壽靜齋 柳鼎文의 아들인 孔巖 柳致好의 딸인 全州 柳氏와 혼인하여 姜泌을 낳았다. 姜泌은 자신을 表再從弟라고 하였으니, 수신자는 壽靜齋 柳鼎文의 曾孫 가운데 한 사람이 되는데, 아마도 奮山 柳淵鱗인 것으로 보인다. 姜泌은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에 협조하였다가 옥고를 치른 바 있다.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