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11월 15일, 류연린이 자신의 공부 상황을 전하고 방문 계획을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
1922년 11월 15일에 奮山 柳淵鱗(1868~1939)이 자신의 공부 상황과 방문 계획을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먼저 격조하던 중에 당신의 편지를 받아 감사하고 자신이 당신을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였다. 당신을 만나려고 계획하였으나 여러 가지 일로 그 계획을 실천하지 못하니 그 죄송스러움을 어찌 적겠냐고 하고 있다. 이어서 상대방과 그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있다.
이어서 柳淵鱗은 근래 전혀 스스로를 검속하지 못하여 문란하게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한창 나이에 가는 세월을 아까워하며 부지런히 공부해야 하는 일을 소홀히 하여, 집안에서 전해 내려 온 遺業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고 있으니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래서 상대가 편지에서 家學에 대해 운운한 것은 족히 자신들로 하여금 부끄러운 마음이 들게 했다고 하였다. 따뜻한 봄이 되면 고모를 찾아뵙고 姜橒 선생의 사당을 배알하고 小室의 꼭대기에 올라 좋은 경치를 바라보고 싶다고 하였다.
발급인 柳淵鱗은 자가 見卿, 호가 奮山이고 西山 金興洛 문인으로 響山 李晩燾의 사위이다. 일제강점기 때 군자금 모금을 주동하였으며 유고 2권이 전해진다. 또한 편지에 등장하는 松西를 통해 수취인이 진주강씨 임을 알 수 있다. 松西는 姜橒(1772~1834)의 호이다. 그는 1798년(정조 22)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807년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正字 ‧ 典籍 ‧ 持平 ‧ 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821년 이후로 관직에서 물러나 여러 講會에 참석하여 『心經』 ‧ 『近思錄』등을 강의하면서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후에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이 편지는 전주류씨와 진주강씨 사이에 교류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진주강씨와 전주류씨는 혼맥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柳淵鱗에게 晉州姜氏 집안으로 시집간 고모가 있었던 듯하다. 즉 영남 지역의 사족들은 혼인을 통해 향촌사회에서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했던 것이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