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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금석기(琴錫基)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5+KSM-XF.1921.4790-20130630.02592570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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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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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금석기, 금호열
작성지역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작성시기 1921
형태사항 크기: 23.5 X 56.3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태자 봉화금씨 매헌종택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921년 금석기(琴錫基) 서간(書簡)
이 편지는 조카인 琴錫基(1865~1924)가 숙부인 琴祜烈(1853~1925)에게 보낸 것이다. 소작농들의 관리와 그에 따른 문제들에 대해 상세하게 보고하면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의견을 묻고 있는데, 소작농들이 도조를 제 때에 납부하지 않자 移作牌를 보내었는데 이로 인해 발생한 일들을 사람에 따라 정황별로 전달하고 있고 더불어 이작을 할 것인지 소작을 다시 허용할 것인지 등을 묻는 내용이 담겨 있다.
최은주

상세정보

1921년 1월 3일, 조카인 琴錫基(1865~1924)가 소작농 관리 상황을 상세하게 전달하기 위해 숙부인 琴祜烈(1853~1925)에게 보낸 편지
1921년 1월 3일에 조카인 琴錫基(1865~1924)가 숙부인 琴祜烈(1853~1925)에게 보낸 편지이다. 소작농들의 관리와 그에 따른 문제들에 대해 상세하게 보고하면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의견을 묻고 있다.
첫 머리는 숙부 내외의 안부와 자신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신은 세밑에 묵은 병이 다시 도지려는 듯 했으나 탈 없이 지나가 안심했는데, 지금 막 쌓인 火氣가 솟아올라 없애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그리고 여러 집안이 모두 여전히 편안하다는 소식을 들어 다행이라고 하였다. 또, 明先이라는 인물이 아직 내려오고 있지 않음을 말하며, 그 아내의 무릎 통증이 쾌차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 같다는 생각을 내비쳤다. 그 집안일을 걱정하며 더불어 마을도 역병으로 상한 사람이 많은데 역병이 잠잠해지지 않았다며 걱정하였다.
다음부터는 소작농들의 상황을 본격적으로 언급하였다. 먼저 遠塘洞 金也가 경작하고 있는 논[畓]의 賭租에 대해 말하였다. 金也의 賭租를 계속 거두지 못하고 있는데, 이 때 尹道天馬場石村家에 와서 전하기를 金也에게서 그 이전의 도조는 고사하고 작년 것도 거두기가 어려울 듯하니 차차 상황을 보아가며 도모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한다. 이에 금석기가 도조 징수는 둘째 치고 移作을 고민해야 하는데 이 또한 함부로 할 수 없는 문제가 있으니 당분간 좀 기다려 보겠다고 대답했다고 말하고 있다. 野牧朴羅溪의 경우는 지난 11월 그믐쯤에 斗谷의 叔氏가 가서 올해 도조 3석 10두를 거두었고, 작년 도조 1석과 돈 12량을 12월 18일에 거두었다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에게 移作하는 문서를 12월 27에 부쳤는데, 어제 2일에 박나계가 와서 논의 일에 어찌 이리 매정할 수 있냐며 몇 년 동안 돌보던 사람을 무슨 일로 끊느냐고 간곡히 빌기에 소작을 허락하고 숙부에게 편지를 올린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朴元文에게도 移作牌를 보내었으나 그 역시 20원을 갖고 와서 金谷의 도조를 10일 안에 납입할테니 소작을 허락해달라고 애걸하고 있다며, 그가 10일까지 숫자대로 납입한다면 소작을 돌려주어도 괜찮겠다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또한 蘆谷 山井의 경우 숙부의 지시대로 이작패를 보내었다고 하였고, 九津의 소나무 파는 일과 遠村의 가옥 매각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보고하였다.
발신자 琴錫基와 수신자 琴祜烈의 본관은 모두 奉化이고, 금호열은 梅軒 琴輔(1521-1584)의 10代胄孫이 된다.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최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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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921년 금석기(琴錫基) 서간(書簡)

叔父主前。上白是。

伏不審。新元。
兩位氣體候順序萬康。渾節一例否。伏慕不任
下忱。舍姪。歲下宿祟闖發之慮。因循無事以度。
而當此發春之節。積火斗起。實難除却。惟
大小各家諸致。印版多幸。明先尙不下來。而
其婦之脚痛。姑無快差之望。大氐其家之事。未
知末梢之如何耳。村節以痘症。多有見敗者。而姑未
開霽耳。遠塘洞金也許畓事。郵書臘十七日來
到。卽使崔斗明往見。則金驥洙任置租十石。已於十六
日。沒數覓去。未始無晩時之嘆也。金也許所去書。須
不傳致。尹道天來于馬場石村家。而言內。舊條則不可擔
之。雖庚申條。金也之事勢。萬無推覓之道。若擔之而
最後未捧之境。則豈不良貝乎。最後若無寃徵於
渠。則願爲作人。當去看做去覓賭之計云云。自我思之。
則賭租之捧不捧姑舍。移作不可不爲。而亦難擅行。故
姑小竢也。答之耳。野牧朴羅溪事。至月晦間。斗谷叔氏
往捧。今年賭三石十斗及作年條一石(依高氏勸)。錢十二兩矣。錢則臘月十八日捧。
移作書則臘卄七日付送矣。昨二日羅溪來言曰。畓事何如
是昧情乎。以舊條一石。不以錢而以谷之致耶。幾年顧護
之地。以么麽事而絶之耶。願爲裁書仰請于金谷也。百般
懇乞。是亦竹天面難喠也。遂許以上書耳。朴元文事。
數次招對。則藿價以二百兩任我。而我不擔之。責之以賣
却納錢也。則姑無區境。移作牌晦間給于李業伊。使之
往言於元文矣。右漢具十二圓。今日來言曰。金谷條一
百三十五兩內七十五兩。以今十日來納矣。此意上書
云云。亦百般哀乞。此亦果以十日沒數來納。則還作似
可耳。蘆谷山井事。幷依敎送牌耳。九津賣松事。
姑無願買者。而遠村家屋事。以至歇價外。更無他計
也。現今村土賣却。而丙云。居基址價。以百圓。分三年納付之
令。來督丙云之捺章。丙云姑因循謀避。然他皆施行。
則何可獨不乎。此時賣買。非歇則不能矣。何以則可乎。
似無二百圓見價者云耳。丙云則賣不賣間。當做他
穴計云耳。餘在續後。不備白。
辛酉 元月 三日 夜。舍姪錫基 上白。

案山家事谷苞。則沒入於上溪宅。而姑未安定。他人則幷如瑩
弟而無策耳。石灘事亦如之耳。宋溫溪亦伊后無言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