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1월 3일, 조카인 琴錫基(1865~1924)가 소작농 관리 상황을 상세하게 전달하기 위해 숙부인 琴祜烈(1853~1925)에게 보낸 편지
1921년 1월 3일에 조카인 琴錫基(1865~1924)가 숙부인 琴祜烈(1853~1925)에게 보낸 편지이다. 소작농들의 관리와 그에 따른 문제들에 대해 상세하게 보고하면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의견을 묻고 있다.
첫 머리는 숙부 내외의 안부와 자신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신은 세밑에 묵은 병이 다시 도지려는 듯 했으나 탈 없이 지나가 안심했는데, 지금 막 쌓인 火氣가 솟아올라 없애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그리고 여러 집안이 모두 여전히 편안하다는 소식을 들어 다행이라고 하였다. 또, 明先이라는 인물이 아직 내려오고 있지 않음을 말하며, 그 아내의 무릎 통증이 쾌차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 같다는 생각을 내비쳤다. 그 집안일을 걱정하며 더불어 마을도 역병으로 상한 사람이 많은데 역병이 잠잠해지지 않았다며 걱정하였다.
다음부터는 소작농들의 상황을 본격적으로 언급하였다. 먼저 遠塘洞 金也가 경작하고 있는 논[畓]의 賭租에 대해 말하였다. 金也의 賭租를 계속 거두지 못하고 있는데, 이 때 尹道天이 馬場의 石村家에 와서 전하기를 金也에게서 그 이전의 도조는 고사하고 작년 것도 거두기가 어려울 듯하니 차차 상황을 보아가며 도모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한다. 이에 금석기가 도조 징수는 둘째 치고 移作을 고민해야 하는데 이 또한 함부로 할 수 없는 문제가 있으니 당분간 좀 기다려 보겠다고 대답했다고 말하고 있다. 野牧의 朴羅溪의 경우는 지난 11월 그믐쯤에 斗谷의 叔氏가 가서 올해 도조 3석 10두를 거두었고, 작년 도조 1석과 돈 12량을 12월 18일에 거두었다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에게 移作하는 문서를 12월 27에 부쳤는데, 어제 2일에 박나계가 와서 논의 일에 어찌 이리 매정할 수 있냐며 몇 년 동안 돌보던 사람을 무슨 일로 끊느냐고 간곡히 빌기에 소작을 허락하고 숙부에게 편지를 올린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朴元文에게도 移作牌를 보내었으나 그 역시 20원을 갖고 와서 金谷의 도조를 10일 안에 납입할테니 소작을 허락해달라고 애걸하고 있다며, 그가 10일까지 숫자대로 납입한다면 소작을 돌려주어도 괜찮겠다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또한 蘆谷 山井의 경우 숙부의 지시대로 이작패를 보내었다고 하였고, 九津의 소나무 파는 일과 遠村의 가옥 매각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보고하였다.
발신자 琴錫基와 수신자 琴祜烈의 본관은 모두 奉化이고, 금호열은 梅軒 琴輔(1521-1584)의 10代胄孫이 된다.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최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