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1월 11일에 鄭建模가 자신의 근황을 전하고 姪郞이 자신이 있는 곳에서 공부하도록 요청하기 위해 李鉉謨에게 보낸 편지
1920년 1월 11일에 鄭建模가 자신의 근황을 전하고 姪郞이 자신이 있는 곳에서 공부하도록 요청하기 위해 李鉉謨에게 보낸 편지이다.
歲初에 正元 이후 곧바로 연락을 하라고 하셨는데도 근래에 진흙탕에 막혀 말씀대로 하지 못해 항상 슬퍼하는 중에 從彧이 편지를 받들고 문을 두드리니 왼손으로 편지를 쥐고 오른손으로 손을 잡음에 새해에 진실로 처음으로 재미가 있었고 모두 건강하게 잘 계신 것과 마을에 역병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자신은 얼마 전에 50년 의지하던 從叔의 祥日을 보내어 예전을 그리는 슬픔이 새해를 맞은 느낌 보다 더하다고 하였다. 새집에서 추위를 겪은 사람이 모두 병이 들 근심이 있지만 遠弟가 歲 전에 손녀를 얻었는데 끝내 불길하였고 阿姪도 疥瘡을 얻어 또한 건강하지 않아 미간을 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직 환절기에 병을 면했고 姪嬌도 보살핌을 입어 잘 보내고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孫兒의 婚事를 河上에 정하여 어제 저녁에 昏使가 보았고 오늘 낮에 장차 관례를 할 계획이니 이것이 한 가지 재미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보여 말씀하신 바는 읽어감에 황송스러움을 감당할 수 없는데 合下가 계신 마을의 용렬한 자신이 해를 보내며 보잘것없는 학업마저도 버려 완전히 타락했다고 하였다. 그대도 또한 보아서 아시는 바인데 오히려 이러한 말씀을 하시니 이것이 矜憐히 여긴 데서 나온 것이며 경계하여 드러낸 것임을 알겠다고 하였다. 姪郞을 오래 보지 못한 나머지에 상면했는데 모든 것이 조금 전진하여 아낄 만했고 만류하여 이곳의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도록 하고 싶은데 감내하여 그렇게 해줄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轎行은 마땅히 함께 의논하여 다시 告하겠다고 하였다.
발급인인 鄭建模(1866~1935)는 본이 東萊이고 자가 可範이며 號가 匏山이다. 부는 鄭翼煥이며 英陽에 거주하였다. 수취인인 李鉉謨(1853~1927)는 자가 景贊이고 호는 仁廬 또는 亦人齋이며 李壽五의 제 3자로 寧海 仁良里에서 태어나 1896년에 英陽 石保面 做士洞으로 이주하였다. 『仁廬處士遺稿』가 전한다.
편지 내용 중의 “姪郞”은 동래정씨의 딸과 결혼한 李秉坤(1904~1959)으로 추측된다. 李秉坤은 仁廬 李鉉謨의 맏형 李鉉成(1847~1903)의 손자이다. 鄭述模의 딸과 결혼하였다. 1920년 당시는 이병곤의 父 李元浩(1878~1908)와 祖 李鉉成 모두 사망한 시점이다. 따라서 이병곤의 일에 대한 주선을 이현모가 한 것으로 추측된다.
仁廬處士遺稿, 李鉉謨, 2003
載寧李氏寧海派譜, 載寧李氏寧海派宗中譜所, 2006
김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