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9월 16일, 李性求 ・ 李悳求가 여러 근황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1918년 9월 16일에 李性求 ・ 李悳求가 여러 근황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8월 7일에 상대가 작성하여 보내준 편지에 대해 답장이 늦어진 점을 사과하였다. 인편을 찾기가 쉽지 않았고, 의논해서 정할 것에 대해 결말을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어느새 가을도 거의 끝나가고 단풍과 국화가 한창 무르익은 이때에 상대 형제 등이 평안한지 안부를 묻고, 上堡의 喪事로 인해 기가 막히고 말았다고 하였다. 兩家의 근래 쇠락한 형편으로는 한 가닥 남은 氣脈을 부지할 수 없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이다지도 궁색하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느냐고도 하였다. 이어, 자신들 형제는 옛집을 수리하는 일에 골몰하고 있고, 특히 이덕구는 왜경의 핍박으로 곤경을 겪고 있다고 하면서, 조금도 세상사는 재미가 없다고 하였다. 이덕구는 왜경의 핍박에 대해 격렬히 대항하는 것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고 하면서, 결연한 의지를 내비쳤다. 塔洞과의 婚談은 편지와 만남을 통해서 이미 七八分의 허락을 얻어내기는 하였으나 끝내 快諾을 받지는 못했다는 소식도 전하였다. 끝으로, 巖亭에 비석을 세우는 일이 과연 내달 보름께로 정해졌는지 묻고 그때 상대를 뵐 계획이라고 하였다.
肯庵 李敦禹는 金在恭의 딸(義城金氏, 葛川 金煕周의 손녀), 金康壽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결국 후사를 잇지 못하고 晩園 李重明을 후사로 들였는데, 발신자 李性求와 李悳求는 곧 李重明의 아들들이다. 시기적으로 이 편지의 수신자는 奮山 柳淵鱗(1868~1939)일 것으로 보인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김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