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11월 1일, 宜齋 姜泌이 외조모의 忌祭에 참석하지 못함을 알려기 위해 奮山 柳淵鱗에게 보낸 편지
1917년 11월 1일에 宜齋 姜泌(1878~1942)이 외조모의 忌祭에 참석하지 못함을 알려기 위해 奮山 柳淵鱗(1868~1939)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오랫동안 격조하여 늘 그리운 마음이 있었지만 봄부터 겨울까지 한 번도 인편을 구하여 안부편지를 보내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미안한 마음을 전하였다. 이어 服中의 상대 및 아들들, 손자, 同堂 여러분의 안부를 물었다. 봄에 있었던 從氏 형님의 喪事는 비록 천수를 누린 것이기는 하지만 애통한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아직까지 한 번도 위문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조만간 마땅히 그러한 逋慢한 죄를 갚을 것이지만 그 전에는 슬프고 부끄러운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松外의 근황은 어떠하냐고 묻고, 그의 새로 태어난 자식이 꽤 총명하여 앞으로의 희망이 크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집안의 명맥이 이 아이에게 달려 있다고 하였다.
어느덧 외조모의 忌日이 임박하였는데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은 外孫인 자신도 다를 바 없이 크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忌祭에 참석하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원통한 마음을 가눌 수 없다고 하였다. 姜泌은 자신의 어버이께서 고령이 되어 가시면서 筋力이 자연 떨어지셨는데 조섭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번번이 병을 얻는다고 하면서, 참으로 곁을 떠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오랫동안 상대를 만나려는 생각만 가지고 지금까지도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으니,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을 매몰차고 야박하다고 비난해도 변명할 여지가 없다고 하였다. 끝으로, 다시 한 번 외조모의 忌祭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유를 안팎으로 나누어 언급하였다.
宜齋 姜泌은 白樵 姜夏奎의 손자이자, 晩山 姜鎔의 아들이다. 姜鎔은 孔巖 柳致好의 딸인 全州 柳氏와 혼인하여 姜泌을 낳았다. 따라서 柳致好의 아들인 柳哲鎬는 姜泌에게 외삼촌이 되고, 柳致好의 손자인 柳淵兢과 柳淵永은 姜泌의 사촌이 된다. 따라서 수신자는 이 둘 가운데 한 사람일 것으로 보이지만, 壽靜齋 집안과 관련지어 볼 때 이 집안 문건 가운데 1913년과 1918년에 보낸 姜泌의 편지에서 한 문건 내에서 ‘表從弟’와 ‘表再從弟’를 함께 쓰고 있다는 점, 표종제가 霞洞宅과 관련 있다는 점 등으로 보면 수취인은 자신의 表再從인 奮山 柳淵鱗일 가능성이 높다. 姜泌은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에 협조하였다가 옥고를 치른 바 있다. 본문에서 언급된 외조모란 姜泌의 외조부 孔巖 柳致好의 後配인 義城 金氏를 가리키는데, 참고로 그녀의 기일은 11월 5일이다.
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