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10월 10일, 琴祜烈이 아들 相基에게 메주 쑤는 일과 楓井 賓의 방문, 마을의 사정 등을 알리는 편지
1917년 10월 10일, 琴祜烈이 아들 相基에게 메주 쑤는 일과 楓井 손의 방문, 마을의 사정 등을 알리는 편지이다.
아들이 떠난 뒤로 집에 여러 가지 있었던 일 몇 가지를 전하고 있다. 첫 번째로 메주 쑤는 일에 관해서 콩 값이 매 되마다 8전 5푼이고 쌀값이 1냥 7~8전이라고 하며 봉화는 값이 어떤지 물었다. 또 어미는 메주를 그곳에서 만들어 이듬해 봄에 짐삯을 주고 운반하는 것도 괜찮다고 했지만 호열은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다고 하였다. 두 번째로 풍정의 賓이 와서 金塘에서 文村으로 보낸 전보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음을 알리며 왜 그러한지를 물어 보았다고 하는 말을 상대에게 전하였다. 그리고 풍정 빈은 예천읍에 처자를 두고 왔다며 되돌아갔다고 하였다. 셋째로 權致三이 올해 이곳으로 이사를 올 방법이 없냐고 물었다고 하였다. 景玉도 聖執에게 부탁하여 이사 오기를 기약하였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지금 짐을 실어 보내는 사람은 김 안동의 맏아들로 짐삯과 음식 대접 외에 2원을 주라는 당부를 하였다. 그리고 그를 돌려보낼 때 목화와 참깨 등의 물건을 붙여 보내달라고 하였다.
발신자 琴祜烈(1853-1925)은 본관은 奉化이고, 자는 景受이다. 수신자 琴相基은 금호열의 아들이다. 본관은 봉화이고, 字는 聖洛, 號는 石湖이다. 忠淸道 觀察府 主事를 지냈다. 『大字帖』 2책, 『金剛山遊錄』을 지었다.
본문에서 언급한 콩 값 ․ 쌀값의 당시 현가가 기재되어 있어서 이를 통해 당시 예천지역의 경제적 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이 편지는 국한문을 혼용하여 쓴 특징이 있는데, 한문 문장에 한글로 토를 달아 놓은 양식으로 기재되었다.
김순주